우리나라 간척의 역사 > 자연환경

본문 바로가기
자연환경 > 간척과 개간 > 우리나라 간척의 역사
■ 우리나라 간척의 역사

본문

우리나라는 온대와 아열대 기후 특성상 농경문화가 발달했고, 그중에서 특히 벼 재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논농사는 BC 1세기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 기에 벽골제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리사업도 일찍부터 발달됐음을 알 수 있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나라는 산악지가 많은 반면 농경지가 협소하고 특히 논으로 활 용할 만한 토지가 그리 많지 않아서 비교적 논으로 이용 가능성이 높은 곳을 선택해 간척 지 개발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1235년(고종 22) 몽고군의 침입을 피해 강화 도로 천도한 후 전략적으로 연안 방조제를 축조해 해상 방어는 물론 군량미를 조달하는 일 석이조 효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간척의 기원이다. 순수한 농경지를 조성하기 위한 간척은 고려 1248년(고종 35) 몽고병란시 군량미 조달을 위해 병마판관 김방경이 안 북부(평안남도 안주, 청천강하구)의 갈대섬에 제방을 축조해 농지를 조성하고 백성들에게 경작케 한 것이 시초다.

조선시대는 주로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강화도(삼간·태청·장지·굴진포·기포 등), 황해도(사리원), 평안남도(위도)에 간척지를 조성했다. 특히 정다산丁茶山은 『목민심서』에 서 기중가起重架라는 기구를 만들어 큰 돌을 이용한 제방축조 기술과 배수갑문축조 방법을 기록했다. 간척사업 실적을 기록한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국가 외에 민간인도 간척사업에 참여한 자료가 있어 간척사업이 매우 활발하게 추진 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군량미 조달을 목적으로 산미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유수면 매립 법, 간척지 이주장려 보조규칙, 수리조합령 시행규칙 등을 공포해 간척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당시 간척지 조성 기술은 궤도 인력 토운차·우마차·손수레·트럭 등을 이용 해 제방기초에 돌을 보강하는 수준이었다. 한편 전라북도 김제군 광활면 옥포리에 농사시 험장(작물시험장 전신) 간척지 출장소를 설치하고 간척지 시험을 수행하기도 했다.

해방이후 1945~1960년경에는 간척사업 마무리와 국민식량 확보 차원에서 소규모 간척 사업이 활발히 추진돼 간척사업의 재건기를 맞이했으나 당시 간척 기술은 일제강점기 때 의 기술을 모방한 수준이었다. 1961~1972년에는 경제개발 계획에 의한 식량증산을 목 적으로 UN특별기금 간척 조사 협정체결(정부~FAO-UN특별기금), 공유수면관리법, 토 지개량사업법(방조제관리법), UN특별기금 한국간척사업기구(UNTID) 발족, UNTIDNEDECO에 의한 간척자원조사, 동진강 수리간척 방조제 준공, 대단위 농업종합개발 사 업(평택지구·금강지구)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주요장비는 트럭, 크레인, 소형선박과 6~8톤 덤프트럭 등이었다. 이 시기를 선진기술 도입 시기(60년대 초반), 기술 확립시기 (60년대 후반), 기술 성숙기(70년대)로 세분할 수 있다. 1973~1990년 사이를 우리나라의 독자적 간척기술 활용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대단위 간척사업(아산·삽교·영산강·금강)과 민간의 대규모 간척사업 시행(김포·서산 A,B지구), 간척자원조사(건설부·농진공) 계화도 지구, 농업종합개발 사업 등이 대형 덤프트럭(12톤), 준설선 등 건설 장비의 본격적인 생산에 힘입어 지역농업 종합개발사업(배후지 포함)이 활발히 추진됐다.

1991년 이후는 우리나라 간척기술의 선진화 시기다. 시공 장비의 대형화 및 다양한 종류의 건설장비 개발 보급으로 지역별 농어촌 광역종합개발 차원의 거점 개발추진(시화·새만금 지구)과 대규모 간척사업 준공(금강 하굿둑·김포·서산 A,B지구·영산강Ⅲ-Ⅱ지구), 새로운 간척사업 착공(화옹·홍보·고흥지구 등) 등이 다목적 종합개발 간척사업 목적으로 추진됐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