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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지역의 간척과 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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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시대의 간척과 개간


역사적으로 간척은 고려후기부터 시작됐다. 1248년 평안도 안주지방 위도를 간척했다는 내용이 고려사에 있고, 강화천도를 하며 선두포를 간척했던 사실도 있다. 간척은 조선건국 후 더욱 활발했다. 평택현은 태종 대 이후 현으로서 체제를 갖추었으나 궁핍했다. 경작률은 높았지만 면적이 적고 토질이 좋지 않아 농산물 생산량이 적고 풍족하지 못했다. 제언을 쌓아 개간한 곳이 많았지만 지력이 약했고, 해염 등으로 제언과 논들이 빈번하게 피해를 입었다. 특히 평택현 지방은 충남의 일부 지역과 함께 홍수나 해일로 피해를 자주 입었다.

조선은 농업을 중요시해 건국 초기부터 개간과 간척을 장려했다. 도평의사사에서 “수령守令의 전최殿最는 전지의 개간이 많고 적은 것으로써 3등으로 나누어,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시키는 데 빙고憑考(참고)”할 것을 건의할 정도로 개간은 권농의 중요한 항목이었다. 이에 해안지역 간척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조선초기 간척은 척신戚臣·권세가·궁가宮家 등 훈구 대신들이 주도했다. 특히 평택지역은 토족들의 기반이 약한 지역이라 조선초기부터 권세가들에게 매력이 있었다. 개국공신 권근權近이 평택현의 해택을 받아 방죽을 쌓아 밭을 만들었고, 1426년(세종 8) 예조참판 이명덕은 평택현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평택현의 간전墾田은 2천 2백 34결, 진위현의 간전墾田은 2천 8백 41결이라고 할 정도로 간척이 활발했다. 1476년(성종 7) 영산부원군 김수온이 절수折受를 구실로 삼기언三岐堰의 논을 빼앗아 농장을 만든 일도 있다. 중종 때 봉성군鳳城君의 종 효림孝林과 사노私奴 종동終同·옥동玉同 등이 평택 땅 굴포堀浦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툰 일도 있었다. 인조 때에는 평택현 등 5개 지역에 간척을 위해 쌓은 바닷가 제언이 해일로 무너져 침몰된 일도 있었다. 평택현은 훈구대신들이나 궁가에서 절수를 구실로 해택지를 개간할 때 주민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돼 적지 않은 부담이 됐고 불만 또한 컸다. 평택지역은 조선초기부터 바닷가 해안선 주변에 적지 않은 제언을 축조했는데, 이는 간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간척 규모가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양난兩難(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였다. 양난 이후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고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키는 일이 시급했다. 개간지에 대한 면세 혜택을 주고 간척을 독려했다. 우선적으로 개발한 개간지는 본래 경작지였으나 전란으로 황폐해진 황무지였다. 조선후기 미곡이 주요 상품으로 거래되면서 해안저습지도 간척되기 시작했다.

간척사업에는 많은 혜택을 제공했지만 누구든지 참여할 수는 없었다. 개간을 원하는 사 람은 고을 수령으로부터 일종의 임시 개간권인 입안立案을 발급받아야 했는데 이것을 절수 折受라고 했다. 입안을 발급받을 때는 사전에 입안을 받은 사람이나 절수 받은 궁실이 있는 지, 사패 받은 권세가가 있는지 면밀히 살폈다. 중복 발급하게 되면 분쟁이 발생했기 때문 이다. 입안을 발급받은 사람은 점유한 갯벌을 노동력을 동원해 간척한 뒤 양안(토지대장) 에 등록해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간척사업에는 국가·궁방·사대부·상민층이 고루 참여했다. 농민들도 간척에 참여했지 만 자본과 노동력의 한계로 소규모 간척밖에는 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자갈이나 모래, 진 흙으로 제언을 쌓았다. 이것을 ‘원뚝’이라고 불렀다. 소규모 제언은 절구공이 등으로 제대 로 다지지 않아 조수에 의해 침식되거나 태풍에 둑이 터져버리는 일이 많았다. 대규모 인력동원이 가능하고 자본이 있었던 국가나 궁실, 권세가들은 장비와 기술, 자재 를 투입해 대규모 간척을 했다. 조선후기에는 빈농들이 많아 노비가 아니더라도 노동력 동 원은 어렵지 않았다. 또 간척이 끝난 뒤에는 이들과 병작竝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노동력 확보에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었다.

간척을 한 뒤에는 염분제거가 중요했다. 다산 정약용은 간척지 염분제거는 최소 6년이 걸린다고 했지만 서유구의 『임원십육지』에는 10년이 걸린다고 했다. 염분제거 방식은 논 에 빗물이나 민물을 가둬두는 담수법이 가장 많이 사용됐다. 담수 후 염분함량이 2/1,000 이하가 돼야만 벼를 심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조선후기 중국으로부터 염분에 강한 신품종 벼가 도입돼 간척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평택지역은 북쪽의 무봉산과 덕암산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야지대이다. 조선전기 부터 수전농업이 발달했다.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에 ‘진위현은 땅이 척박하다, 경작지 는 2,841결인데 논밭이 반반이다’라 했고, 평택현은 ‘비옥한 곳과 척박한 곳이 반반인데 논 이 2/3가 된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후기에는 둔전屯田이나 궁방전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둔전이나 궁방전은 면세전免稅田이다. 1891년 『진위현읍지』에 전체 토지 중 면세전이 53%였고 면세전 중에서도 궁방전이 83%였다. 18세기 초 사찬私撰 『팽성지』에 궁실에서 절수折受해 면세된 전답이 몇 백결이 돼 고을의 조세수입이 너무 적다는 기록도 보인다.

평택지역에 궁방전이나 역둔토와 같은 면세전이 많은 것은 서울과 가까워서 소출 운송이 편리했고, 바닷가에 위치해 간척에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흉년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궁민窮民들이 바닷가 쪽을 유랑하다가 정착해 소규모 간척을 통해 조성한 경작지도 있었다. 소규모로 간척된 민전民田은 양안에 등록하지 않았을 경우 무주지無主地(주인 없는 토지)가 돼 궁실이나 권세가들이 차지하기가 용이했다. 토지 가운데 어떤 땅이 궁방전이었고 역둔토였는지, 권세가의 토지였는지 확실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양안을 살펴보는 방법도 있고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조선 말기의 추수기와 각 지역의 지명, 일제강점기의 『조선지주명부』도 있다.

평택평야에는 ‘궁’자가 들어있는 지명이 많다. 마을에는 고덕면 ‘궁리宮里’, 팽성읍 ‘평궁리·신궁리’가 있고, 오성면 신리에 ‘삼궁원’, 인접한 천안시 성환읍에도 안궁리가 있다. ‘궁논들’, ‘궁틀’처럼 경작지에도 ‘궁’자가 들어있는 지명도 있다. 통복동의 ‘창월’이라는 마을은 선조의 6번째 왕자였던 순화군의 추수창고 너머에 형성된 마을에서 유래됐다. 고덕면 동고1리에 있었던 ‘수어창리’는 조선후기 5군영의 하나였던 ‘수어영’의 둔전에서 거둬들인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에 형성된 마을이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후기 추수기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 추수기란 궁방전 宮房田이나 둔전屯田의 추수기록이다. 추수기에는 조선후기에서 대한제국시기 평택지역에 내장원이나 궁내부·내수사·경리원에서 관리했던 토지, 명례궁(덕수궁)의 궁방전, 공신 들과 후손들을 대우하기 위해 설치한 충훈부의 토지, 장용영·수어영·총융청·진위대의 운영을 위한 둔전, 수진궁(봉작을 받기 전에 사망한 대군이나 왕자, 출가 전에 죽은 공주 를 제사하던 사당)의 토지, 현종의 딸이고 숙종의 누이였던 명혜공주방의 토지, 팽성읍 추 팔리의 화천역 토지 등이 있었다는 기록들이 보인다.

추수기에 나타난 토지들은 서탄면 금암리, 회화리 일대의 해정들과 건너편의 금각들, 진 위면 하북리·야막리·가곡리·갈곶리 일대, 팽성읍 평궁리 일대의 통한들, 석봉리 일대 의 번개들, 수몰돼 폐동된 소북면 동암리 일대, 송화1리 개화마을 일대, 노와리·대사리· 석근리·두정리 일대, 칠원3동 수촌마을 일대, 오성면 신리·교포리 일대에 널리 분포돼 있었다.

양난 이후 평택지역의 간척은 국가나 궁실이 중심이 됐고 간척 대상지역은 대부분 안성 천과 진위천의 배후습지(간석지)였다. 국가나 궁실은 군대나 농민들을 동원해 대규모 제방 을 쌓고 간척을 해 양안에 등재한 뒤에는 다시 농민들에게 경작하게 했다. 이렇게 생겨난 마을들이 궁리·평궁리·신궁리·안궁리·삼궁원이었고, 서탄면 회화리·마두리·금암 리, 진위면 하북리·야막리·가곡리, 오성면 신리·교포리, 팽성읍 송화리·노와리·근내 리·두정리·석봉리와 같은 마을에서는 인구도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개간이나 간척干拓은 경작지를 확대해 생산량을 늘리고 증대하고 조세수입을 늘리는 방 법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재정상태가 일정수준을 유지하도록 황폐한 진전陳田(토지대장에 는 등록됐지만 경작을 하지 않는 토지)의 세금은 면제했으나 진전과 해택지(갯벌), 화전火田의 개간을 통해 과세지를 확보하려 했다.



고덕면 궁리들(2012)

| 고덕면 궁리들(2012) |



구한말 근대이행기의 간척


농업국가에서 경작지 확대와 조세수입 증가는 가장 일반적인 부국강병책이었다. 갑오개 혁으로 영향력과 재정이 약화된 왕실은 왕실보유 토지를 늘리고 운영자금을 확보하기 위 해 황무지와 해택지 개간에 관심을 보였다. 개화파 인사들도 간척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광무개혁(1897) 뒤 황제권이 강화되자 개간이나 간척에 왕실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아졌 다. 왕실은 개간을 담당하던 농상공부와는 별도로 궁내부 내장사에 수륜과를 설치해 연해 안의 범람지와 갯벌을 적극 간척하게 했다. 또 민간 개간권의 허가와 과세권도 수륜과에서행사했다.

조선의 개간정책은 일본이 개입하자 변화하게 된다. 일제는 1903년 황무지 개간권을 빼앗기 위해 노력했다. 왕실의 개간사업을 관장하던 수륜원을 폐지하고 내정간섭이 가능한 농상공부로 개간권을 이전한 것도 수탈공작의 일환이었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국가소유 미간척지(국유미간지)에 대한 독점적 개간권을 요구했다. 일제가 요구한 황무지 개간권은 대한제국 정부와 보안회 등의 반대에 부딪쳐 일시적으로 유보됐지만 결국 을사늑약(1905년) 뒤 다시 일본으로 넘어갔다.

1907년 7월에는 ‘국유미간지이용법’을 제정했다. ‘국유미간지’의 개념에 황무지·초생지·소택지·간석지를 비롯해 민간인들이 자유롭게 농사짓던 ‘무주한광지’와 소유권이 불분명한 민유지民有地까지 포함시켰다. 이로써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하천부지나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짓던 농민들의 권리가 박탈됐고, 몇 년씩 묵혀두던 토지의 주인들도 권리를 잃었다. 반면 일본인들은 광범위하게 적용된 국유미간지의 개념에 따라 법률적 요건만 갖추면 개간지를 대여 받아 개인적으로도 개간사업에 참여하고 등기를 이전해 소유권을 확보하게 됐다.

하천변과 해안가를 중심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던 미간지와 갯벌, 공유수면에 대한 권리행사를 일본인들이 하게 됐으며, 안성천·진위천변에 농민들이 간척했지만 소유권이 없었던 땅들이 장차 토지조사사업(1910∼1918)으로 일제에게 빼앗기기 시작했다.

식민지 초기 일제는 수리조합과 경지정리사업을 통해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데 주력했다. 1차 대전 이후 일본의 식량사정이 악화되자 부족한 식량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경지확장에도 힘을 기울였다. 1919년 4월 제정된 ‘개간조성법’은 시대적 변화에 대한 대응이었다.

일제는 ‘개간조성법’에 따라 황무지 개간이나 간척사업을 추진하는 회사나 개인에게 국가자금을 지원하고, 미간지 불하와 대여 등 각종 혜택을 부여했다. 이에 전국적으로 간척 붐이 일어났다. 간척 붐은 일제 말 전시체제기에도 활발해 1941년에는 국유미간지 부여 및 불하면적이 전국적으로 3만 7,698정보에 이르렀고, 공유수면 준공인가도 5만 4,755정보나 됐다.

평택지역은 외국인의 토지소유가 법적으로 금지되던 1907년 이전부터 일본인에 의한 토지침탈이 있었다. 평택지역에 대농장을 소유하던 와다 츠네이치和田常市는 1904년 평택지역 평택역 부근(현 원평동, 군문동)에서 농사를 짓다가 나중에 수백 정보町步4)의 토지를 개간하고 일본담배를 재배해 큰 부자가 됐다.

1905년 12월 수원군 백봉리(현 청북면 백봉리)에 거주하는 서상천이 이서면(현 서탄면 마두리 일대)의 간척지 100여 석 지기의 땅을 윤택영에게 매매했고, 이것을 윤택영이 일 본인에게 되팔아 서탄면 금암리에 일본인 농업회사 ‘진위흥농振威興農’이 설립됐다. 진위흥 농은 간척과 곡물경작, 판매를 위한 회사였으므로 이들에 의해 금암리 일대 해정들과 주변 미간지 상당 부분이 간척된 것으로 보인다.

1906년 4월 평택지역 18개 마을(위치 미상)이 경작하던 벌판을 일본인이 간척하겠다며 마음대로 값을 정하고 주민들에게 팔도록 강요하다가 거부당하자 일본헌병을 앞세워 협박 하고 구금하는 사태도 있었다. 평택지역에서는 ‘국유미간지이용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서 상천과 같은 조선인 지주에 의한 간척, 일본인들에 의한 강압적 토지매입과 간척이 적극적 으로 전개됐다.



오성들(2010)

| 오성들(2010) |



일본인과 평택의 간척


평택 최대의 들판 오성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간척된 것은 1930년대였다. 그 전에 토착민 들이 소규모 간척을 했지만 규모 면에서는 일본인들에게 비교할 수 없었다. 당거리 주민 김 기식(80세, 2003년)씨는 오성들을 간척한 사람들은 일본인 히라하라平原와 요시모토吉本이었다고 했다. 이들은 바닷물이 드나들고 주민들이 소규모 간척을 했지만 소유권 등기가 없었던 국유미간지 1000여 만 평에 간척허가와 자금지원을 받아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였다.

간척이 끝난 뒤 요시모토는 오성면 신리 삼궁원과 교포리, 창내리 일대에 농장을 만들어 전통적인 지주-마름 체제로 농가장경영을 했다. 당거리 길음리 일대를 간척한 요시모토吉本는 당거리 정수장 옆에 농장회사를 세우고 토지경영을 했다. 오성면 신리와 고덕면 궁리 일대는 일본인 가토加藤가 간척해 농장을 만들었다. 가토는 궁안교 입구에 농장사무실을 차리고 토지경영을 했다. 오성들에는 창신초등학교 주변을 간척해 만든 일본인 농장이 두 개가 더 있었고 안화리 일대에도 간척으로 형성된 동양척식(주) 농장과 수원의 부재지주 농장이 섞여 있었다.

청북면 삼계2리 삼덕초등학교 앞에 있는 ‘장둑’은 삼계리에서 옥길리를 연결한 제언堤堰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은 장둑을 쌓았다. 원삼계 주민 이정순(84세, 2005년)과 고잔리 주민 신권식(84세, 2013년)씨는 동양척식(주)이 노사카 칸지野坂寬治라는 일본인을 시켜 제언을 쌓고 간척을 완성했다고 한다. 제언이 완공되자 안쪽에 수류지와 수문을 만들고 옥길리 장살미산에서 퍼온 흙을 채운 뒤 몇 년 동안 물을 가둬두어 염기를 빼냈다. 지금도 동척농장들이라고 부른다.

팽성읍 두리와 신호리, 석봉리 일대의 번개들, 함판들, 검은들도 일제강점기에 간척됐다. 두1리 머래마을에는 동척농장과 일본인 농장이 여러 개 있었으며 농감農監으로 일하던 고지마, 기로니, 요시하라같은 일본인들과 지주 몇 사람도 거주했고 커다란 곡물창고와 정미소도 있었다. 신호1리 새말에 거주하는 강병균(74세, 2009년)씨는 신호2리 주변의 검은들, 번개들은 부친이 젊었을 때 일본인들이 간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간척에는 조선인들도 참여했다. 1924년 12월 29일 <동아일보>에 오성면을 비롯해 3개 면에 거주 하는 김교영, 박세보 등 714명이 자본금 100만 원으로 개척조합을 조직하고 731정보의 국유미간지를 간척하겠다며 대부 출원해 허가를 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안중읍 덕우리 만석꾼 이강세는 1939년 이후 7년 대 가뭄과 홍수로 굶주린 사람들이 속출하자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홍원리 마장마을에서 청북면 옥길리를 연결하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시작했다. 간척사업에 참여했던 마장마을 임병호(82세, 2007년) 씨에 의하면 이강세는 2100석 분의 농지를 처분해 공사비에 투입했다. 노동력은 홍원리와 석정리, 옥길리 일대의 주민들을 고용하고 일당 50∼60전을 지불해 충당했다. 간척장비는 삽과 지게, 들것, 가래와 같은 농기구를 사용했다. 공사는 시작됐지만 조수潮水가 거칠기로 유명한 남양만 물살이 둑(제언)을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터진 둑을 다시 쌓기를 반복하다가 1944년 공사가 중단됐고 이강세는 해방 하루 전날 마을 뒷산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한다. 대부분 국유미간지였거나 궁방전, 역둔토였던 평택평야는 많은 사연을 지닌 간척사업을 통해 품질 좋은 평택미를 생산하는 비 옥한 경작지로 탈바꿈했다.

한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 진 위군 고두면과 오타면은 지금의 고덕 면 남서쪽과 오성면 서쪽지역이다. 이 지역은 오성들, 안화들, 번개들을 중심 으로 본래는 황무지거나 갯벌이었다가 조선후기부터 간척사업이 벌어진 지역 이다.

간척사업은 새로운 마을을 형성해 1789년 호구 총수에는 안화리, 주교, 다릿개와 같은 마을뿐이었던 것이 『조선지지자료』 (1914년)에는 안화리(안화1리 우다내)·송대리(안화2리)·송호리(교포리 궁말)·교포리 (다릿개)·신리같은 마을로 확대됐다. 또 고덕면지역인 오타면에는 동고리·수어창리·효 학리·궁리·신리·방시천리·해창리·울성리같은 마을이 보여 이전보다 마을 수가 증가 했다. 이전보다 마을 수는 증가했지만 인구 증가는 크게 보이지 않는다. 식민지 초기여서 국가 차원의 대규모 간척사업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0년대 팽성읍 안정리-일본인농장

| 1910년대 팽성읍 안정리-일본인농장 |



적산과 간척지


평택지역에서 개간은 경작지를 확대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근대 이전 평택지역에는 개간할 수 있는 황무지가 광범위하게 여러 곳에 있었다. 설령 개간됐다고 해도 논보다는 밭으로 경작되는 경우도 많았고, 갯벌이나 공유수면 간척은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 가 많았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경제발전에 따른 식량확보가 절실했던 일제는 각종 법령과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황무지와 경작지를 수탈했고, 간척이 가능한 국 유지를 확보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개간사업이 진행되면서 저습한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됐다. 평야지대 에 두집 매, 세집 매 형태로 시작됐던 마을은 호가 증가하고 인구도 늘었다. 주로 안성천 과 진위천의 중·상류지역과 지류支流의 배후습지들이 개간됐다. 중·소규모의 간척은 진행 됐지만 오성들이나 번개들, 한판들과 같이 대규모의 새로운 평야가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서평택지역의 경우 바닷물 유입을 막고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보는 여러 개가 축 조됐어도 간척으로 새로운 평야가 조성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해방 후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일본인 재산(적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였다. 친일잔재 청산과 자주적인 민족국가 건설도 중요한 이슈였다. 민중들은 ‘공장은 노동자에게, 농토는 농민에게’를 외쳤다. 토지는 일본인들과 친일 지주들의 땅을 몰수해 무상분배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 속에서 미군정청은 ‘일본인 소유의 모든 재산은 미군정에 귀속된다’고 선포했다. 미군정이 접수한 적산 처리는 관료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이 맡았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친일경력이 있던 보수적 인물들이어서 친일잔재를 청산하거나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입장이 아니었다.

1948년 7월 ‘일본정부에 의해 적산으로 동결된 재산의 해제’가 발표됐다. 이에 따라 귀속재산 일부가 불하됐으며, 나머지 적산은 정부수립 후 불하됐다. 평택지역 귀속농지들도 대부분 정부수립 전후 농민들에게 불하됐다. 평택역 본정통의 일본인 기업체나 상점, 안중·서정리 일대의 귀속재산들도 일반인에게 불하됐다. 적산농지 불하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지역은 원평동을 비롯해 팽성읍 두리·신호리·평궁리, 고덕면 궁리·두릉리·문곡리, 오성면 신리·창내리·안화리, 청북면 현곡리·삼계리 등 일제강점기 간척된 동척농장이거나 일본인 농장이었던 곳들이다. 일제 말 국유미간지로 간척허가를 받았지만 미처 간척되지 못했던 갯벌이나 황무지, 공유수면들도 일반인에게 불하됐다.

1950년 6월 농지개혁이 실시됐다. 농지개혁은 미군정 하에서 준비만 하다가 1950년 3월 농지개혁법을 공포하면서 6월 1일부터 실시됐다. 남한의 농지개혁은 북한처럼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아니었고 전체 소작농지의 38%만이 분배됐다. 전쟁으로 휴전 뒤에 체계적으로 정리됐고 적산농지와 조선인 부재지주의 농지가 많았던 평택지역에는 지주층이 급격히 감소하고 자영농이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피난민 정착사업과 간척



팽성읍 신대·도두지구 개간(1954)

| 팽성읍 신대·도두지구 개간(1954) |



한국전쟁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전쟁 피난민이 발생했다. 특히 1951년 1·4후퇴 때 미군이 북한지역에 핵폭탄을 사용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대규모 전쟁 피난민이 남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다시 고향에 돌아갈 줄 알았다고 한다. 가지고 나온 돈이나 물건이 많지 않았고, 가급적 백령도나 인천같이 북한과 가까운 지역에 머물려고 했다.

평택지역에는 평안도나 황해도 피난민들이 많이 몰렸다. 백령도나 용유도, 강화도 등 경기도 서해안 일대에 머물 던 사람들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분단 이 고착화될 조짐을 보이자 정착할 땅 과 경작할 토지가 필요하게 됐다. 이승 만 정권은 피난민들을 트럭에 태워 황 무지나 갯벌이 넓은 바닷가 쪽에 씨앗 을 뿌리듯 내려놓았다. 평택지역에 내 려진 난민들은 곳곳에 난민정착촌을 만들었다. 난민정착촌은 비전2동 문화 촌이나 합정동 박산 등 벌판이나 팽성읍, 포승읍, 청북면 등 갯벌이 넓어서 간척이 가능한 지역에 생겼다.

당시 황해도 연백 출신 차연홍車連弘5)은 경기도로부터 1955년 10월 5일 포승 홍원지구와 청북 고잔지구 450ha에 대한 개간 승인 허가를 받고 250세대가 정착해 밀가루와 옥수수 등 식량을 지원받아 3년간에 걸쳐 175ha를 개간했다.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농기구 도 삽·곡괭이·지게 등이 고작이었다. 개간된 논은 세대당 2100평씩 분배받아 경작했다.

팽성읍 함정2리, 도두리, 신대2·3·4리, 포승읍 홍원1리 및 원정6리 등은 한국전쟁 뒤 형성된 대표적인 난민정착촌이다. 함정2리와 신대4리 말랭이는 본래 휴전선 근처 경기도 장단에서 내려온 피난민들 정착촌이었다. 일제강점기에 30% 정도 간척됐지만 대부분의 제방이 유실돼 버려져 있던 도두리벌을 장단군수 이갑노와 평택군수가 합의해 다시 간척 했다. 간척된 농지는 식구 1인 당 300평씩 불하했고, 대금은 현물로 갚기로 했다.

신대2, 3리도 난민정착사업소였다. 신대2리 영창마을 주민들은 일제 말 경상도 경주와 영천에 살다가 북민정책이 실시되자 강원도 철원으로 집단이주했다. 한국전쟁이 장기화되 면서 철원지역이 최대의 격전지로 변하자 다시 피난보따리를 싸서 평택으로 이주했다. 신 대3리 장단마을도 경기도 장단지역 피난민들의 난민촌이었다. 이들이 간척한 지역은 안성 천 하류의 갯벌과 공유수면이었다. 거의 맨손으로 공유수면을 간척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공사가 중단될 위기도 여러 번 있었다. 4년 만에 간척을 완성했고 완성된 뒤에도 벼를 심기에는 또 오랜 시일이 필요했다. 고덕면 문곡4리 신흥동도 난민정착사업으로 시작된 마을이다. 1956년 피난민들은 심송영 씨 주도로 개척단을 조직해 동청1리에서 문곡4리 사이의 갯벌을 간척했다. 피난민들은 정부의 구호품으로 집을 짓고 지게와 들것만으로 간척을 시작했다. 간척에는 성공했지만 초기 염분을 제거하는 기간에는 먹을 것이 없어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었다. 농사가 시작된 뒤에는 염분함유량이 높아 약간의 가뭄에도 벼가 타죽는 아픔도 겪었다. 일제 말 안중읍 덕우리의 이강세가 일명 ‘강세둑’을 쌓아 간척을 시도했던 포승읍 홍원리와 청북면 옥길리 사이의 갯벌도 황해도 연백피난민들이 간척했다. 지금도 ‘연백사업장들’이라고 불린다. 포승읍 원정6리와 도곡2리 사이의 당두염전들과 화성염전들도 피난민들이 간척했다가 농지로 바꾸지 못하고 염전鹽田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도두리들(2010)

| 도두리들(2010) |



[피난민 개간 정착 현황] (단위 : 명/ha)
승인 연월일 정착호수 정착사업구분 개간예정
지목
정착사업장
소재지
피난민
출신지
대표자
세대 인구 지목 면적
1952. 7. 2 83 569 하천부지 80 팽성 마두리 장단 권문식
1952. 9. 18 93 629 황무지 100 팽성 추팔리 장단 이흥기
1954. 4. 11 220 1,447 하천부지 220 고덕 동고리 북한 당승업
1954. 5. 13 150 915 하천부지 150 팽성 신대리 북한 당승업
1954. 10. 11 200 1,060 황연지 199.7 오성 창내리 미수복지 홍순하
1954. 10. 13 30 200 임야 25 평택 비전리 북한 당승업
1954. 11 .6 70 415 황연지 70 팽성 석봉리 장단 이흥기
1955. 8. 1 140 874 간석지 48.4 염전 포승 원정리 북한 김대현
1955. 8. 10 125 742 귀속농지 125 서탄 마두리 연백 김형재
1955. 8. 23 70 417 하천부지 70 평택 통복리 북한 당승업
1955. 9. 26 120 608 하천부지 150 팽성 도두리 장단 변종식
1955. 10. 5 380 2,242 간석지 450 청북 고잔리
포승 홍원리
연백 차연홍
1955. 10. 31 100 550 간석지 44.36 염전 청북 고잔리 옹진 강석관
1955. 10. 31 100 662 간석지 55.24 염전 청북 고잔리 북한 주용규
합계 1,881 11,330 총 14건 1,787.7        


1950년대 전쟁피난민들은 일제강점기에 간척하지 못했던 갯벌이나 공유수면까지 간척 해 경작지를 확장했지만 간척 뒤 소유권분쟁에 휘말려 오랫동안 시달리게 됐다. 세종대학 교를 소유한 대양학원과 무려 40년 이상 분쟁했던 신대2, 3리 주민들이나 도두리벌 안의 암기원들, 흑무개들 소유권 갈등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대양학원과 농지분쟁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 150세대가 평택 팽성읍 신대리와 도두리 일대에 정착했다. 이들은 난민정착 사업 승인을 받고 하천 부지 260정보를 간척하기 시작했다. 피난정착민은 정부 와 원조 단체들이 지원한 식량으로 4년간 공사 끝에 3km의 제방을 축조하고 농지를 조성했다. 이후 6년간 염분 제거와 평탄 작업 끝에 1963년 간척 토지 중 일부를 세대당 3,000평씩 분배받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1963년 그동안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던 서울여자학원(현 대양학원, 세종대학교 재단)이 토지소유자임을 주장하면서 그동안의 소작료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1965년 대양학원이 토지인도청구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시작됐다. 1968년 간척농민들은 패소해 삶의 터전을 빼앗길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후 농민들은 정부와 경기도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정부와 경기도는 1981년 대양학원을 상대로 토지소유권 확인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1985년 패소했다. 농민들은 1987년 11월 대양학원 이사장실을 점거하는 등 강경하게 투쟁했다. 간척농지 현지에서도 농성을 전개하는 등 1996년까지 분쟁이 지속됐다. 10년 넘게 집단행동이 이어지고 농민들은 간척을 허가한 경기도에 책임을 묻게 됐다. 경기도는 1996년 재단과 농민 간의 중재에 나서 분쟁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 경기도는 도 소유의 토지를 분쟁지역과 교환해 경기도가 농민에게 재불하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경기도는 1998년과 1999년 ‘지방재정법’ 및 ‘경기도 공유재산관리 조례’를 개정했다. 2000년과 5월 8일 제1차 감정평가를 했으나 농지 감정가가 실제가보다 높게 평가됐다. 대양학원은 이에 반발해 교환불가를 주장했다. 2001년 7월 12일 제2차 감정평가 한 결과에 대해 농민들은 수용했으나 경기도는 과소평가됐다고 하여 화해하지 않았다.
1차 화해에 실패한 경기도는 농민들이 농지를 구입할 수 있도록 대출해주면서 대토하는 방식을 추진했다. 2002년 2월 경기도는 현대산업에서 개발한 서산간척지를 대토로 제안했다. 농민들이 수용하자 경기도는 80만 평을 구입할 수 있는 농지구입자금 188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농지구입 지원 조건은 연리 1.5% 3년 거치 17년 분균 상환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농민들은 담보능력 한계 등의 문제로 포기했다.
이러한 와중에 미군기지 이전 사업이 확정돼 간척농지 20만 내지 30만 평을 수용하게 됐다. 정부는 평택시와 경기도, 대양학원, 농민들 간의 분쟁조정을 다시 시작했다. 2004년 12월 20일 임대차 계약연장 및 영농보상비를 해당 농민들에게 지급해 줄 것과 미군기지로 편입된 농토 보상가 중 20%를 농민에게 지급할 것을 대양학원과 농민들이 합의했다. 이로써 대양학원과 농민 간 50여 년간 지속됐던 간척농지 분쟁이 정리됐다.



아산만방조제와 평택평야


아산만방조제 준공 모습(1974)

| 아산만방조제 준공 모습(1974) |  | 아산만방조제 건설직전(1970) |


해방 후 간척사업은 피난민들만 했던 것은 아니다. 위험한 어업보다는 농사짓기를 원했던 갯가의 어촌마을이나 안정적으로 농업자본에 투자하기를 원했던 자본가들도 간척사업에 참여했다. 미군기지 확장에 따라 고향마을에서 강제 이주당한 대추리 주민들, 충청도, 전라도에서 이주한 빈농들도 간척사업을 벌였다.

오성면 신리·교포리·창내리 주변 오성들은 다양한 계층이 간척했다. 본래 바닷물이 밀 려들던 갯벌과 황무지뿐이던 오성들에는 주교(다릿개), 월랑촌, 창내 등 작은 규모의 마을 이 중심이 돼 소규모 간척이 이뤄졌다. 농민들은 가래나 지게 등으로 가마니에 흙을 넣어 둑을 쌓았다. 이렇게 쌓은 둑을 ‘원둑(제언)’이라 불렀다.

지금은 미군기지 확장으로 수용된 도두리벌, 곤지나루와 흑무개들에 남아 있는 ‘큰원’, ‘작은원’, ‘봄이사논(원)’, ‘신원’ 등의 지명이나, 오성들의 ‘길마원’, ‘안원’, ‘안두원’, ‘아홉가 래원’, ‘세가래원’ 같은 이름들은 간척의 흔적이다. 오성들이나 도두리들은 둑이 완성되면 먼저 염분에 강한 보리나 메밀을 심었다. 보리나 메밀을 추수하고 겨울에는 짚을 썰어 넣 거나 물을 가둬두어 염기를 빼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야 벼를 심을 수 있었다.
오성들 간척에서 가장 큰 적은 침식작용이었다.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올라오던 안성천과 진위천은 백중사리 때는 조석간만의 차가 11미터가 넘었다. 내륙 깊숙이 들어온 바닷물이 썰물 때 급하게 빠지면서 강안江岸이 깎여 침식되는데, 심할 때는 하루 70m가 넘었다. 침식 이 심해지자 팽성읍 북쪽의 동언리는 일제강점기에 폐동됐고, 해방 후 오성들의 안두원·양성말 마을이 폐동됐고, 월랑촌이나 길마원, 안중읍 삼정리 마을은 폐동 직전까지 갔다.
지난至難했던 간척, 징그러웠던 물과의 싸움은 1974년 아산만방조제와 남양방조제가 준공된 후 경지정리사업으로 일단락됐다. 방조제 준공으로 드넓은 간척지가 새롭게 조성됐고, 포승읍 홍원4·5·6·7리와 청북면 고잔리, 팽성읍 도두2리, 함정2리 등에는 대청댐 수몰민, 전라도와 충청도 빈농들이 정착했다. 아산만방조제로 해산물이 풍부했던 안성천 하류와 아산만 갯벌과 바다를 잃게 됐지만 농업용수 부족과 만성적인 수해, 염해에 시달리던 평택평야가 옥토로 바뀌게 됐다.



평택지형을 바꾼 평택지구다목적농업개발사업



평택지구다목적농업개발사업 기공식에서 연설하는
박정희 대통령(1971년 3월 23일, 평택성동초등학교)

| 평택지구다목적농업개발사업 기공식에서 연설하는 박정희 대통령(1971년 3월 23일, 평택성동초등학교) |



아산만방조제와 남양방조제가 축조되기 전 평택과 화성, 충남 아산군 일대는 농업용수 부족으로 한해와 홍수, 조류 역류로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 많았다. 천수답이라 불리던 농지는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들었고, 홍수가 나면 농사를 망쳐버리기 쉬운 악조건이었다. 안성천과 진위천, 황구지천, 오산천 등 자연하천이 있었지만 아산만 해수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가뭄에는 하천 주변만 원시적인 방법으로 물이 공급됐을 뿐 만조 때나 홍수 때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965년 평택지구다목적농업개발사업이 추진됐다. 이해 6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농업종합개발계획 지시에 따라 평택지역에도 본격적으로 개발사업이 시작됐다. 다목적 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이해 10월 세계은행에 차관 예비신청서를 제출했다. 세계은행은 조사단을 파견해 평택지구 외 4개 지구를 차관 대상지구로 선정했다. 1966년 4월 10일 기본조사를 착수해 1967년 사업지구에 대한 기술적 타당성 검토를 마쳤다.

1968년 평택지구, 금강지구 개발사업 차관 신청서를 제출해 세계은행에서 조사단이 사업타당성 평가를 했고 1969년 세계은행차관위원회는 한국에 차관을 제공하기로 확정했다. 국회에서는 차관 도입을 동의했고 이듬해 1970년 9월 30일 사업시행인가 및 사업시행고시가 있었다.

평택지구다목적농업개발사업은 기존 개발방식과는 달리 구릉지와 하천 연안 일대를 포함한 개발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사업 종목도 농업용수, 배수개선사업, 경지정리, 산지개발, 간척 등 종합개발사업이었다. 1970년 12월 30일 평택지구 다목적 농업개발사업 기공식과 아산만방조제 착공을 했다.



아산만방조제 배수갑문(2010)

| 아산만방조제 배수갑문(2010) |



아산·남양방조제 축조와 담수호 준공


아산만방조제 건설모습(1973)

| 아산만방조제 건설모습(1973) |  | 남양방조제 배수갑문 |


아산·남양방조제 축조와 담수호 사업은 안성천과 발안천 하구 주변 18,500ha의 천수답과 구릉지, 야산을 개발하는 사업이다. 이 지역은 서해안 의 해류가 역류하는 안성천과 발안천 하구를 끼고 있어 조금만 가물어도 상 류지역의 농업용수가 고갈되고 짠 바 닷물이 역류해 한해와 수해, 염해가 겹 치는 악순환에 시달렸다. 이를 개선하 기 위해 안성천 하구에 아산만방조제,발안천 하구에 남양방조제를 각각 축조하기로 했다. 해수 유입을 차단하고 바다였던 곳에 평택호와 남양호 두 담수호를 조성하는 한편 이 물을 관개할 용수시설과 지구 내의 경지정리, 개답, 간척 등을 포함한 대단위 종합개발 사업이었다.

아산·남양방조제 축조와 담수호의 사업구역은 2도 4군 15개면으로 평택지역은 팽성읍·오성면·포승면·청북면·고덕면 등 5개면이 해당됐다.



[아산·남양방조제 축조와 담수호 시행 전후 개발 면적 비교]


지목 시행전(ha) 시행후(ha)
수리안전답   16,608
천수답 7,326  
수리불안전답 4,114  
2,199 1,099
임야 1,235  
과수원 106 712
염전 및 간석지 2,653  
유지 및 기타 786  
18,419 18,419


사업비는 총 37,656백만 원이 투자됐다. 이중 국고보조가 26,153백만 원, 세계은행 차관 11,503백만 원, 그리고 WFP 양곡을 무상으로 지원받았다.



[아산·남양방조제 축조와 담수호 사업 후 주요시설]


시설내용 단위 수량 비고
방조제 개소 2 연장 4,624m
배수갑문 개소 2  
양수장 개소 19  
배수장 개소 1  
용수로 km 966  
배수로 km 50  
용수터널 개소 95  
용수암거 개소 1,546  
용수잠관 개소 249  
용수교량 개소 1,687  


아산·남양방조제 준공식(1974년 5월 22일)

| 아산·남양방조제 준공식(1974년 5월 22일) |



1974년 4월 성공적으로 아산·남양 방조제와 담수호 공사를 마무리하고 같은 해 5월 22일 준공식이 있었다. 이로 인해 평택지역은 많은 농경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경사지개발과 경지 정리 등을 통해 축복받은 농경지로 탈 바꿈했다. 가뭄이나 홍수로 재해가 끊 임없이 반복됐으나 두 방조제가 축조 됨에 따라 농가는 안심하고 영농할 수 있는 획기적인 토대가 마련됐다.

두 담수로 안쪽에 새롭게 형성된 간척지는 토심이 깊고 토성이 답작에 적합해 개답을 했 다. 개답한 결과 아산방조제 구역은 397ha, 남양방조제 구역은 2,285ha의 간척지를 확보 할 수 있었다.



[간척지 개발 현황]


구분 단위 아산만 남양만
개답면적 ha 397 2,285 2,682
용수로 km 37 163 200
배수로 km 201 30 201
도로 km 24 71 95


개발된 간척지는 차관금 상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유상분배를 했다. 유상분배 대상자로는 제1지구는 기정착 난민 100호에 1ha씩 100ha를 분배하고, 제2지구는 대청댐 수몰민 700세대에 1ha씩 700ha를, 제3지구는 대한반공청년회 50세대에 2ha씩 50ha와 서울특별시 추천 철거민 50세대에 1ha씩 50ha, 원호대상자 100세대에 1ha씩 100ha, 일반공모 114세대에 2ha씩 228ha, 기타 149호에 3ha씩 447ha 등 총 1,263세대에 1,725ha를 각각 분양했다.



[평택지구 간척 농지 분배 내용]


지구별 분배
대상자
분배 규모
(ha)
호수 면적
(ha)
입주자
추천기관
비고
제1지구 기정착 난민 1 100 100 경기도지사 남양방조제 주변
현 거주자
제2지구 대청댐 사몰민 1 700 700 건설부장관 평택군
제3지구 대한반공청년회 2 50 100 회장 화성군
서울특별시
철거민
1 50 50 서울특별시장 화성군
원호대상자 1 100 100 원호처장 화성군
일반 공모 2 114 228 입주자 대상 추첨 화성군
기타 3 149 447    
    1,263 1,725    




(성주현_청암대학교 교수)

주석

4) 10,000㎡로 약 3,000평
5) 차연홍은 황해도 연백군 연백읍 온천리 출신이다. 일본 벳부別府토목학교를 졸업했다. 독촉국민회연안온천부 지부장, 대한 독촉연안지단 위원장, 연안온천중학교 후원회원, 연안온천소방단 단장 등으로 활동했고,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안을지구에서 국민당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6·25전쟁 시 국민방위군으로 입대해 하동교육대장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인사록』, 『경향신문』,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