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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지역의 농지 개혁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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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회에서의 농지개혁과 평택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평택지역은 진위군과 평택군이었다. 1909년경의 평택지역은 논이 3468결結, 밭이 1229결結이었고 재배작물은 쌀·겉보리·밀·호밀·콩·팥·조·피·수수·옥수수·면화·삼·저마·연초·뽕나무 등이었다.127)
일제 강점기의 미곡수탈 및 식량증산정책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전 국토의 40%를 일본인 소유로 만들었으며 농민 대부분이 소작농화 됐다. 1920년대의 산미증산계획에 의한 수리시설확충은 농경지 확대를 위한 조선 공유수면 매립령(1917년)에 의한 간척지 개발로 이어졌다. 평택지역도 부분적 간척을 통해 일본인을 위한 농지 개발이 있었다.

·진위군 청북면과 수원군 6개면 개간–1921년 968.5정보의 간석지 확보
·포승면 간척-1923. 8. 17 준공, 14.1정보(개답 면적 13.5정보 개간)



해방이후 평택지역의 농지개혁과 변화


해방이후 평택지역의 농지는 미군정에 의한 귀속농지 분배, 1948년 정부수립 후의 ‘농지개혁법’에 의한 농지분배 과정을 통해 많은 소작농이 자작농화 됐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 자료에 의하면 경기도의 농지분배는 87∼89%가 이뤄졌으며 1949년 5월 연합신문 보도에는 전국 귀속농지의 90%가 분배 완료됐다고 기록돼 있다. 경기도는 양도대상 세대 30,993호, 면적 293,253반反(10반보=1정보=3,000평)이었고 기 양도는 30,904호 243,764반이다.
평택지역도 대부분 농지개혁에 따른 분배가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농지개혁에 의한 토지분배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주춤하다가 1952년 식량증산 및 수리시설복구 자금지원(UNKRA-국제연합 한국재건단), 1953년 제1차 농업증산 5개 년 계획이 시작됨으로써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한 또 다른 농지가 필요하게 됐다. 평택지역 은 한국전쟁의 영향 및 미군 주둔지역(송탄면·팽성면 일대)으로 유입되는 수많은 이북 피 난민들의 새로운 정착지가 됐다. 급작스런 인구팽창은 주거공간과 삶을 영위할 많은 농토 를 필요로 하게 돼 1954년부터 팽성·포승·홍원·원정리 등지에 간척사업을 통해 피난 민 정착지가 생겨났다. 주로 황해도지역 피난민들이 많았던 관계로 간척사업체 명칭도 장 단사업소, 연백사업소 등이었다.
연백사업소는 안중 홍원리·학현리·성해리·삼정리·금곡리, 양성말, 서탄면 마두2리 (1952년에서 3년 간)등을 간척했으며 월남 피난민과 남한 빈농들의 이주마을 역할을 했 다. 장단사업소는 팽성 신대2·3리, 도두리지구 간척을 진행했다. 고덕면 문곡리에는 문 곡리개척단도 있었다. 그러나 오산비행장 건설로 인해 서탄면지역 일부와 구 장터지역 일 부 농토 및 주거지역들은 징발부동산으로 정부 수용됐으며 당시 토지 보상은 터무니없이 적었다고 한다.
1962년 1월 ‘공유수면매립법’이 제정됐다. 공유수면은 건설부가 관할하고 농업 및 수산 업을 목적으로 하는 매립은 농림부에서 처리토록 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한 농업생산력확대-농가소득증대를 목표로 농지보존을 위한 방조제관리에 국가가 나섰다.
1967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1970년대 농지조성사업이 농업종합개 발사업으로 전환되면서 1970년 12월 착공된 아산만방조제와 1971년 4월 착공된 남양방조 제 공사는 1974년 5월 22일 준공식을 가졌다. 아산만방조제(길이 2,564m 총사업비 30억 2천3백만 원), 남양방조제(길이 2,064m 총사업비 23억7천4백만 원)가 평택지역의 홍수 예방은 물론 광활한 농지가 만들어지는 역할을 했으며 효율적으로 수자원이 관리되는 큰 변화를 맞았다. 1972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농촌 근대화와 소득증대 및 생활환경 개선에 기여했다. 1980년대 도시개발을 거치고 1990년대에 들어 도농복합도시(1995. 5. 10 통합 평택시) 형태로 점차 변모했다. 평택지역의 농업은 도시화, 공업화로 인해 농가 가 크게 줄었고 미군기지 확장(대추리·도두리, 황구지리 수용) 등에 의한 농지전용이 많 았다.
2000년대에 전체 농가는 30% 정도에 불과하고 소농보다 중농이나 기업농으로 바뀌는 가운데 평택의 농업은 특산물 개발, 특화사업 육성 등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연도별 농가 호수 및 농가인구]

(단위 : 호, 명)

시군 연도별 농가 호수 연도별 인구 호수
1954년 1960년 1970년 1975년 1979년 1988년 1960년 1970년 1979년 1988년 1992년
평택군 14,014 15,593 18,075 18,808 18,164 - 100,102 100,580 101,207 - -
송탄시   1,628
(1965)
1,676 1,744
(1973)
1,753 1,495 9,218 8,511 10,141 5,781 3,715

주석

127) 1결-한, 목-백, 뭇-열 짐이 한 목, 광해군 때 1결에 미곡 12두가 세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