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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환경 개선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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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전 농촌마을

| 새마을운동 전 농촌마을 |



주택 개량 사업


농촌 주택 개량 사업은 농어촌 주거 생활문화를 계승해 근대적인 생활양식 에 적응하고 전통문화를 유지하면서 살기 편리하고 농어촌의 모습을 아름 답게 가꾸고자 하는 민족의 대역사였 다. 1960년대 이후 정부의 농촌근대화 정책과 경제계획 수행과정에서 생활의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 중 의·식 은 어느 정도 해결 됐지만 농어촌 지역 의 주거생활 환경은 여전히 구각을 벗 어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70년대 초 착수한 새마을 사업은 환경개선 사업에서부 터 출발했고 농어촌 주거환경 개선사업은 새마을운동 초창기부터 새마을운동의 중요한 점 화 사업으로 전개됐다.



● 지붕개량과 농촌의 연료대체


1970년 초까지도 농촌은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 초가집은 최소한 매년 또는 격년제로 지붕을 다시 해야 하는 폐단이 있었다. 또한 농촌에 화학비료가 부족하고 짚을 연료로 사 용했기 때문에 퇴비 만들 자료가 부족했으며 농지가 산성화돼 병충해 발생이 많아 수확량도 감소했다. 때문에 가장 먼저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지붕개량이었다. 1970년 초에는 시멘트로 만든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었다. 초가집보다는 보온성이 떨어지지만 매년 되풀이되는 노동력도 절감되고 짚은 퇴비나 소 사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소 여유가 있는 집은 기와집으로 바꾸었다.
1972년부터 1975년까지 1972년 2,294동, 1973년 3,400동, 1975년 2,720동, 1977년 5,881동으로 총 14,295동이 지붕개량을 해 1975년까지 농촌은 거의 지붕개량이 완료됐다. 다음단계는 농촌의 주택구조 개선으로 부엌을 재래식에서 개량식으로 바꾸었으며 아궁이를 19공탄용으로 개선했다. 산림녹화와 함께 아궁이 개량은 농촌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노동력도 절감되고 퇴비증산도 하게 된 것이다. 연료를 19공탄으로 대체하다보니 산에 조림을 할 수 있게 됐고 정부의 적극적인 치산 녹화정책에 따라 산림을 보전하게 됐고 홍수 피해도 줄었다.



● 농어촌 주택 개량 사업


주택개량중인 현덕면 신왕2리 주민들(1979)

| 주택개량중인 현덕면 신왕2리 주민들(1979) |


지붕개량 사업으로 초가지붕을 기와 또는 슬레이트, 함석 등으로 교체했으나 현존하는 농촌주택 상당수가 하부구조가 약하고 노후 불량으로 전면적인 개축을 하거나 신축 건물로 대체해야 할 상태였다. 따라서 지붕개량 다음은 주택보수 또는 농어촌 건설 방향으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지붕개량을 중점적으로 추진했고 1977년부터 농어촌 주택개량 사업을 시행했다. 농어촌 주민의 복지수준 향상을 도모하고 근대화된 농촌을 앞당기기 위한 사업이었다.
평택군의 경우 국도변, 고속도로변, 철도변에 위치한 불량주택과 하천변 저지대에 사는 취약지역부터 사업을 시행해 점차 농촌마을로 확대 추진했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집중적으로 지원했으며 투자된 내용은 지원이 59%(융자+보조), 자부담이 41% 정도였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평택군의 주택개량사업 추진실적은 총 4,989동을 개량했으며 사업비는 총 91억으로 이중 49억이 지원됐고 자부담은 42억 원이었다.
농어촌 주택 개량 사업의 효과는 첫째, 환경적 측면에서 산뜻한 문화주택과 편리한 마을 환경을 이루게 됐다. 둘째, 정신적 측면에서 일신된 자극과 자조의욕이 계발돼 긍지와 활기가 넘쳐흐르는 진취적인 농가기풍이 조성됐다. 셋째, 경제적 측면에서 설계 표준화에 따 른 자재 개발로 건축 관계 산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주곡 자급화와 농가소득 증가로 인한 소득수준 향상은 문화·복지 향상을 위한 주택개량 사업에 투자됐다. 농촌의 주택 자체가 주택의 재산적 가치 증대로 농어촌 주택투자 확대는 곧 농촌사회 간접자본의 확대를 가져 오고 농어촌 사회의 문화 복지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주택개량 사업 도 추진과정에서 많은 애로사항과 개선될 사항이 있었다.


[새마을 주택개량 사업현황] 129)

(단위 : 동수·명·천원)

구분 실적 참여인원 투자액
연도,
읍면
계획 실적 % 지원금 자부담금
1977 1,853 2,377 128 - 285,240 76,150 209,000
1978 1,328 1,331 100.2 - 109,650 26,810 172,840
1979 301 301 100 - 1,891,291 973,241 918,050
1980 231 231 100 29,963 1,814,222 983,404 830,818
1981 749 749 100 299,600 4,998,822 2,832,737 2,166,085
평택읍 267 267 100 10,680 1,877,040 1,120,075 75,965
팽성읍 89 89 100 3,560 847,158 415,506 431,652
진위면 261 261 100 10,440 1,464,126 808,065 656,061
서탄면 31 31 100 1,240 244,847 134,812 110,035
고덕면 59 59 100 2,360 381,864 255,385 126,479
오성면 19 19 100 760 135,137 77,414 57,723
청북면 3 3 100 120 24,550 17,280 7,270
포승면 - - - - - - -
현덕면 20 20 100 800 24,100 4,2200 19,900


마을 안길 넓히기


마을 안길을 넓히기 전에는 구불구불한 돌담길이나 흙담 길로 사람이나 소가 다닐 수 있는 정도였다. 마을 안길을 넓히는 일은 농업의 기계화를 가능케 했고 생산물의 보관, 유통을 원활히 해 농가 소득증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을회관 건립


마을 앞길 포장을 위해 모래를 운반하는 신왕2리 주민들(1979)

| 마을 앞길 포장을 위해 모래를 운반하는 신왕2리 주민들(1979) |


마을 안길을 넓히는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마을의 새마을 사업에 관한 회합과 준비를 위한 모임장소가 필요해 정부가 지원한 자재로 마을회관 건립을 시작해 전 마을에 마을회관이 생겨 새마을과 관련된 일을 결정했다. 또한 여성들의 참여도 많아져 농촌에 성행하던 도박과 음주의 폐단에서 벗어났으며 주부들의 절미저축이나 생필품 공동구매로 가계 지출을 줄이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컸다. 마을 일들을 결정할 때 토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의사를 결정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평택군의 마을회관은 1972년 137개소, 1973년 55개소, 1974년 27개소, 1980년 6개소로 총 255개소를 건축해 평택군 406개 마을의 55%가 마을회관이 있었다.

주석

129) 평택군, 새마을과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