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과 공무원의 역할 > 역사

본문 바로가기
역사 > 현대 >현대사회와 평택의 변화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과 공무원의 역할
■ 새마을운동과 공무원의 역할

본문

고덕면의 가뭄 극복을 위한 노력(1970)

| 고덕면의 가뭄 극복을 위한 노력(1970) |



1970년 새마을운동을 시작한 이후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공무원들의 노력 또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한다.
새마을 사업 초기단계인 기초 환경개선사업으로 지붕개량 및 주택 개량사업, 변소개량, 부엌개량, 마을안길 확·포장 등이 처음 시작됐다. 소득 증대사업으로 퇴비증산, 다수확 종자개량, 못자리개량, 모내기, 병충해 방제, 적기수확, 추경, 춘경, 논보리 재배 등에 공무원들이 집중 동원돼 독려했다.
지붕개량은 대상자를 선정해 설득해야 했고 그 집에 노동력이 없으면 공무원들이 동원돼 지붕해체를 했다. 또한 어려운 일들 중 하나가 다수확 종자개량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밥맛이 좋은 추청벼를 선호 했는데 정부에서는 다수확품종인 통일 벼를 개량·보급하는데 총력을 기울였 다. 추청벼(아끼바리 쌀)는 소출 면에 서 수확량이 떨어져 다수확 품종을 권 장했는데 증수는 되나 밥맛이 추청벼 에 비해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 농민들 이 기피했다. 이에 다수확품종을 재배 하기 위한 수단으로 농가별 경지면적에 통일벼 재배 목표면적을 부여해 종자를 공급했다.
못자리 설치 후 조사해 목표치에 미달하는 농가는 통일벼로 대체 할 것을 강력히 권장했고 불응하는 농가는 못자리를 파헤치기도 해 농민의 저항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70년대는 농기계가 보급되지 않아 수작업으로 모내기를 하던 시절이라 많은 인력이 필 요했다. 적기에 모내기를 해야 증수할 수 있어 매년 5월 30일 이전에 모를 심도록 권장했 으며 일손이 부족한 농가는 공무원·학생·군인들을 동원해 일손을 도와야 해서 공무원 본 연의 업무는 전부 야근으로 해결해야 했다. 모를 심은 후에는 병충해 방제, 적기수확, 피사 리 등 모든 과정을 공무원이 직접 독려했으며 일손이 모자라면 공무원이 대행했다.
한해旱害가 들면 논에 물을 대주었고 수해水害가 들어 벼가 쓰러지면 벼 세우는 일에 동 원됐다. 한여름에는 퇴비증산을 위해 풀베기 작업을 독려했는데 한낮에는 날씨가 더워 작 업이 어려우므로 새벽에 하도록 독려했다. 일주일에 5일 정도는 새벽 6시에 대상 마을에 출근해 농민들과 함께 풀베기 작업을 했다. 집집마다 퇴비장을 만들고 경지면적에 비례해 목표치를 주었으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담당 부락에 상주하며 독려했다. 가을 추수 이후 논보리 재배를 권장했는데 농민들은 논보리를 심으면 벼 수확이 감수한다며 기피했다. 공 무원들은 직접 경운기로 로타리를 쳐서 심기도 했으며 심지어 밤에 횃불을 들고 작업하는 일도 있었다. 모든 일들이 ‘식량 증산 365일 작전’이란 계획 하에 이뤄졌고 공무원들은 격 무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업무를 수행했다. 주민과 공무원들의 노력은 새마을사업과 식 량자급이라는 녹색혁명을 이룩하는데 초석을 놓았다. 지금의 농촌은 주거환경, 복지시설 등이 완벽히 갖추어져 풍요로운 농촌이 됐지만 1950년대 농촌의 모습과 비교하면 격세지 감이 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