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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한미군기지 이전 관련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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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말 노태우 대통령후보가 용산미군기지 이전을 공약으로 제시
1990.6
 
용산기지 이전 한·미 기본합의서/양해각서, 용산기지를 1996년까지 평택으로 이전,
비용은 한국 측 부담
1990.8 ‘평택반대시민모임’(김용한 외 7인) 결성
1991.5 평택군농민회 등 13개 단체가 공동대책위구성 연대투쟁
1991.7 용산미군기지 평택이전 공식발표
1991.11 고덕면 당현리·서탄면 장등리 주민들 대책위 구성(위원장 남상구)
1993.6 이전비용 부담 과다로 용산기지 이전사업 보류, 미 측에 통보
2001.7 국방부, 주한미군이 제안한 연합토지관리계획 검토 협의 발표
2001.11 미군기지확장 반대 평택대책위원회결성(평택지역 15개 시민단체)

서탄면 장등리-용산기지 이전반대 주민 결의대회(1991)

| 서탄면 장등리-용산기지 이전반대 주민 결의대회(1991) |
 

 

안정리 상인들과 평택지역 보수성향의 시민사회단체의 주한 미군 평택이전 지지 결의대회(2003.5.10)

| 안정리 상인들과 평택지역 보수성향의 시민사회단체의
주한 미군 평택이전 지지 결의대회(2003.5.10) |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대책위 발족식(2003.7.29)

|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대책위 발족식(2003.7.29) |
 

 

팽성대책위 주민들 K-6 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미군기지확장 저지를 위한 주민 총궐기대회’(2004.8.28)

| 팽성대책위 주민들 K-6 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미군기지 확장 저지를 위한 주민 총궐기대회’(2004.8.28) |


2002.3 연합토지관리계획(LPP) 체결
2002.10 평택대책위 미군기지 확장예정지 땅 한 평 사기 운동(605평매입)
2002.10 ‘연합토지관리계획(LPP)’ 협정서 국회 비준 동의
2003.5 한미정상회담(노무현-부시)에서 용산기지 이전 및 미2사단 재배치 합의
2003.7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대책위원회결성(위원장 김지태)
2003.8 평택시 미군기지이전대책협의회 구성(민·관·종교·정치인)
2003.9 평택시 의회 미군기지평택이전대책특별위 구성
2003.11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서탄대책위원회결성(위원장 신용조)
2004.1 제6차 FOTA: 유엔사/연합사를 포함한 용산기지 전체 이전 합의
2004.5 전국시민단체 ‘5.29 반전평화 문화축제’(평택종합운동장∼대추리까지 행진)
2004.9
 
주한미군기지이전에 따른 평택시 지원 등에 관한 특별법안 공청회(김지태
위원장 등 9명 연행 촛불집회 시작)

평택시청 앞 제2차 평화대행진 (2005.12.11)

| 평택시청 앞 제2차 평화대행진 (2005.12.11) |
 

 

재향군인회 등 전국 보수성향의 시민사회단체·K-6 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불법폭력시위 저지대회(2006.5.20)

| 재향군인회 등 전국 보수성향의 시민사회단체·
K-6 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불법폭력시위 저지대회(2006.5.20) |

평택미군기지이전기공식(2007.11.13)

| 평택미군기지이전기공식(2007.11.13) |
 

 

노와리에 새로 조성된 평화마을 대추리 표지석(2010)

| 노와리에 새로 조성된 평화마을 대추리 표지석(2010) |
 


2004.12 용산기지 이전협정 및 LPP개정협정 국회비준
2005.2 범대위(상임공동대표 문정현,김지태 등 8명)전국 115개 단체로 결성
2005.5.19 주한미군의 캠프험프리스 이전 선발대 개소식
2005.7 7.10 평화대행진 개최. 경찰과 충돌(대추초등학교)
2005.12 평택평화대행진 한국재향군인회 ‘미군기지조성 지지’ 집회(K-55 미공군기지 앞)
2006.5.4 국방부 군인·경찰·용역 동원 대추분교 행정대집행 (524명 연행, 수백명 부상) 작전명 ‘여명의 황새울’
2006.5.20 보수단체 ‘폭력시위 저지 결의 대회’
2006.6.5 김지태 위원장 등 관련자 구속
2006.9 대추리와 도두리 빈집 90여 채 철거
2006.11 부지조성공사 착공
2006.12 김지태 위원장 병보석으로 석방
2007.2.23 정부·팽성대책위, 이주협상 타결
2007.3월말 대추리 주민들 44가구 임시이주단지 송화리로 집단이주
2007.11.13 평택미군기지 이전 기공식
2010.10.30 대추리 주민들 노와리에 조성된 평화 마을 입주식
2011.6.30 ‘평택지원특별법’ 일부 개정안 국회통과(2014년에서 2018년 까지)


서탄지구(황구지리·금각리·구장터)


K-55 미공군기지 활주로 양 끝에 위치한 황구지·금각리·구장터는 평소 전투기 이착륙 등 각종 항공기 소음으로 인해 집단으로 정부에 대책마련을 호소해 왔던 지역이다. 2003년 11월 미군기지 확장 반대 서탄대책위를 구성했지만 대부분 주민들은 그동안 겪었던 불편을 해소하고 요구사항을 관철해 이주하고자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2005년 1월 서탄주민대책위 간담회시 공식협상자로 참석한 서탄주민대책위(위원장 신용조 외 6명)가 주민실태 조사를 자체적으로 실시해 12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미군기지 확장이전을 반대했던 서탄대책위는 2005년 1월 협상대책위로 전환하고 그해 3월 주민에 의해 새로 구성된 집행부가 서탄지역 이주택지 후보지 결정을 위한 협약서를 2005년 3월 체결해 집단이주를 결정했다.



철거되기 전 신장1동 구장터 마을전경.
항공기 소음으로 고통을 겪어왔던 곳이다.(2005.11.19)

| 철거되기 전 신장1동 구장터 마을전경. 항공기 소음으로 고통을 겪어왔던 곳이다.(2005.11.19) |



팽성지구(대추리·도두2리·동창리·함정리·신대리)


팽성지구는 1942년 일본군과 1952년 미군의 기지조성 및 확장으로 두 차례나 정든 땅을 내놓고 이주했던 지역이다. 주민들의 저항은 2003년 5월 10일 용산주한미군사령부 상경 집회를 시작으로 2007년 3월 24일까지 935일 동안 완강하게 펼쳐졌다.


2004년 2월부터 12월까지 정부는 대추리·도두2리 반대주민이 주축인 팽성대책위 김지태 위원장, 이상열 조직본부장, 김덕일 정책실장 등과 11차례의 대화를 통해 기지이전사업추진 관련 ‘평택지원 특별법’ 제정, 평택T/F 설립, 평택선정 배경, 대양학원과 임차농간 중재안 등을 논의했다.


팽성 임차농 중심 145세대로 구성된 신대리 농민회는 40년 이상 대양학원 측과 3차의 대법원까지 가는 소유권 소송, 세종호텔·세종대학 장기 점거농성을 통해 최초로 팽성 농민단체를 결성하고 정부와 협상해 2005년 12월 이주문제를 타결 지었다. 그러나 대추리·도두2리를 중심으로 하는 팽성지역 주민들은 범대위와 연대해 반대투쟁을 계속했다. 정부는 2005년 2월 27일부터 5월 2일까지 8차례에 걸친 협상에서 팽대위가 요구한 대토와 현금보상에 대해 서산에 150만평의 대토와 1억 원 상당의 직간접 보상책을 제시하고 또한 ‘국토계획법시행령’과 ‘조세특례제한법’ 등을 개정했다. 그러나 문정현신부가 대표하는 단체의 대추리 상주(2005.2)를 계기로 대화가 중단됐다. 2006년 초 미군기지 이전사업 반대단체와 주민들은 ‘올해도 농사짓자’라는 이슈를 내걸고 트랙터 전국순례, 논갈이 투쟁, 모내기 등 영농강행 등을 지속했다. 정부는 2회에 걸친 영농 차단조치 (2006.3.15, 4.7), 대추분교 행정대집행 및 철조망 설치(2006.5.4)로 대응하며 주민과 정 부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국무총리의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하는 호소문 발표(5.12)를 계기로 대화가 재개됐으나 김지태 위원장이 구속(6.5)되면서 주민측이 김 위원장의 석방을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워 대화가 다시 중단됐다. 이 기간 동안 범대위 문정현 신부의 단식투쟁, 대화재개 요청을 위해 방문한 정부대표단의 억류 등 반발이 계속됐다. 팽성대책위와의 대화가 중단된 상황에서 정부는 도두2리 주민들과 접촉을 시도, 10여 차례의 협의 끝에 10월 2일 자진 이주하기로 합의했다. 도두2리 주민의 이탈로 투쟁동력이 약화된 팽성대책위는 11월 3일 김지태 위원장에 대한 실형 선고를 정치적 재판이라고 주장하며 석방투쟁을 전개했으나 정부는 12월 8일 편입지역 내 철조망을 확대설치하는 등 강력하게 대처했다. 12월 28일 김지태 위원장이 병보석으로 석방되고 대추리 주민들은 정부와 대화를 재개했다. 2007년 1월 2일부터 2월 13일까지 12차에 걸친 협의결과 24개 항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정부는 이주단지조성 및 생계지원 관련사항을 추가 지원키로 하고 주민들은 3월 말 임시 거주지로 이주했다. 2010년 10월 30일 대추리 44가구 주민들은 노와리에 새로조성된 마을에서 입주식을 가졌다.



폐동되기 전 황구지리 마을전경. 좌측상단에 K-55 미공군기지와 활주로가 보인다. 마을과 기지사이에 있는 들판이 모두 미군기지로 편입됐다. ‘평화의 논’도 이 곳에 있었다.(2005.10.18)

| 폐동되기 전 황구지리 마을전경. 좌측상단에 K-55 미공군기지와 활주로가 보인다.
마을과 기지사이에 있는 들판이 모두 미군기지로 편입됐다. ‘평화의 논’도 이 곳에 있었다.(2005.10.18) |



1952년 하늘에서 본 대추리와 K-6 미군기지

| 1952년 하늘에서 본 대추리와 K-6 미군기지 |



철거전 대추리 마을전경. 위쪽으로 K-6 미군기지 활주로와 내리, 동창리가 보인다.(2005.3.3)

| 철거전 대추리 마을전경. 위쪽으로 K-6 미군기지 활주로와 내리, 동창리가 보인다.(2005.3.3) |



마지막 모내기를 해 놓은 대추리 황새울의 야경.(2005.5.22)

| 마지막 모내기를 해 놓은 대추리 황새울의 야경.(2005.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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