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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삼국시대와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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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형세도

| 후삼국 형세도 |



9세기 말 통일신라 사회는 극도로 불 안정한 상태를 보이고 흉년과 전염병 도 계속돼 농민생활이 악화되고 있었 다. 이런 상황에서 반란의 첫 봉화를 든 것은 889년 경상도 상주지방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였다. 이후 죽주(죽 산)에서 기훤箕萱이, 원주에서 양길梁吉 이, 전주에서 견훤이 각각 일어나서 농 민반란을 주도했다. 898년(진성여왕 10)에는 농민들이 서남 해안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경주 외곽까지 쳐들 어가는 일까지 발생했다. 반란세력 중 에서 나라를 세우는 단계까지 진행된 것은 견훤·궁예·왕건이었다. 견훤은 상주농민인 아버지와 광주 호족인 어 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군인으로 출세 했으나 농민반란군을 규합하고 광주지 역을 차지했으며 900년에 전주를 도읍 지로 하는 후백제를 건국했다. 견훤은 세력이 막강해 차령산맥 이남 충청도 를 차지하고 신라의 수도 경주를 습격해 포석정에서 신라 경애왕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 러나 내부 분열은 백제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했고, 936년 왕건에게 패해 멸망했다.

궁예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신라왕족의 후예로 일찍이 승려가 됐으나 환속해 891년 죽 주의 기훤에게 의탁했다. 이 당시 평택지역은 죽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기훤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기훤이 궁예를 업신여기고 예우해주지 않자 892년(진성여왕 6) 북원(원주)의 양길 휘하에 들어갔다. 원주·철원·강릉을 점령한 궁예는 세력이 커지자 양길을 몰아내고 송악에 도읍을 정한 후 901년에 나라를 후고구려라 했다.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었다가 911년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당시 양길은 북원과 충주를 비롯한 30여 개 성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평택지역도 포함됐다.

후고구려는 북으로는 대동강, 남으로는 상주와 공주 등지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광평성(국사총괄)을 비롯한 각종 정치기구를 설치해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궁예는 폭정으로 인해 왕위에 오른 지 17년 만에 부하들에게 쫓겨 나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게 됐다. 935년에 신라를 병합하고 이어 견훤과 아들 신검의 내분으로 분열된 후백제를 무력으로 정복함으로써 936년 후삼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궁예와 견훤이 통일국가 수립에 실패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지역감정에 호소해 정권을 잡고 종교적 권위를 빌어서 복종을 얻어내는 데만 집착했으며 전체 주민의 통합보다 차원 높은 정치이념과 사회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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