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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항쟁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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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침략한 거란은 서북방면의 여러 성들을 공략하고 고종 3년 12월에는 황주까지 내려왔다. 개경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바로 인접지역에 있는 진위현민은 불안해졌다. 이때 봉기한 이장대와 이당필은 나라를 편안하게 하려고 한다는 정국병마사로 칭하고 휘하의 반민들을 의병이라 칭했다.48) 이들이 의병으로 칭하는 것으로 보아 거란군을 막기 위해 일어선 것으로 보인다.

진위현민이 봉기할 때는 거란이 개경 부근까지 침입해 고려정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였다. 고려 군대가 미비해 백성들이 외적의 침탈로 인한 고통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수도가 함락당할 정도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위정자의 탓이었다. 당시 실권자 최충헌은 변방의 경보가 있으면 꾸짖기를 “어째서 이런 작은 일로써 역마驛馬를 번거롭게 하고 국가를 놀라게 하느냐”면서 번번이 알리는 사람을 귀양보냈다. 변방 장수들이 해이해져서 말하기를 “반드시 적병이 두서너 성을 함락시키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달려가 보고해야겠다”고 했다. 최충헌은 자신의 정치기반을 강화시키기에만 급급할 따름이었다.
그 해 12월 거란이 대동강을 넘어 서해도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고 최충헌은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사병을 모집했다. 창자루에 은병을 달아매 백성에게 자랑하면서 수만 명을 모집했고 그의 문객 중 거란 정벌에 종군하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거란군은 가족까지 이끌고 들어왔으므로 기동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고려정부가 무능해 수도가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농민들은 정부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진위현민이 고려정부를 믿지 않고 스스로 힘을 모아 우선 자기 고장을 지키고자 일어난 것이다.

수주水州의 속현이었던 진위현에서 영동정 이장대와 직장동정 이당필이 거란 침입으로 국가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같은 현의 별장동정 김예 등과 봉기했다. 이들은 무리를 모아 현령부인縣令符印을 탈취하고 창고를 열어 촌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자 당시 굶주린 백성들은 모두 그들을 추종했다. 자신들을 스스로 의병이라 칭하고, 정국병마사靖國兵馬使라 자칭하면서 세력을 넓혀 종덕宗德(화성) 하양河陽(아산) 창고를 열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군사들을 먹이면서 광주까지 점령하려고 했다. 이에 고종은 낭장 권득재權得材와 산원 김광계金光啓 등을 보내 안찰사 최박崔博과 함께 광주와 수주 군사를 동원해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다시 충청도와 양광도의 군사로 재차 공격해 진압했다.

반란의 주모자 이장대·이당필·김예 등은 진위현의 토성으로서 영동정, 직장동정, 별장동정이었다. 동정직은 정직에 준해 설정된 산직散職이었다. 문반은 6품 이하, 무반은 5품이하 직에 설정돼 있었으며 그 외에도 이속·향리·승관직 등 관료체계 전 계통에 걸쳐 설 정돼 있었다. 동정직은 한직閑職 및 초입사직初入仕職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여기에 보임 된 사람들은 일정기간 대기했다가 규정에 따라 실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관료층이 팽창해 동정직을 띤 산관들의 희망 실직으로는 진출이 어 려워졌다. 서긍의 『고려도경』에 의하면 인종 대에 관직 수는 3,000개인데 동정직 소유자 는 14,000명이나 됐다고 한다. 따라서 실직 진출의 조건이 까다로워져서 음서로 동정직을 받은 사람도 국자감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1181년(명종 11)에는 초입사직으 로 동정직을 가진 사람 가운데 급제자는 5년, 음서 및 서리출신자는 8년을 대기한 뒤에 실 직으로 나갈 수 있도록 했다. 대우도 점차 열악해져서 초기에는 녹봉 없이 전시과의 토지 만을 지급했으나 1076년(문종 30)에는 토지지급마저 중단됐다. 이들은 지배계급인 관인 층에 속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해 고려사회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장대·이당필은 무신정권하에서 문관 동정직이어서 관직에 나아갈 길이 더욱 암 담했다. 고려사회에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만 등이 겹쳐 이들 동정직자들이 앞장서서 봉 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국가에 의해 소외되고 생활형편이 농민과 비슷하다 하더라도 진위현 의 토호이고 동정직이라는 직책도 있었으므로 마을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 은 의병을 자칭해 보다 타당성 있는 명분으로 주민들을 끌어들여 반정부와 외세방어라는 두 가지 일을 추진하려고 했다.

그들은 우선 종덕창·하양창을 습격해 군량미를 확보한 후에 광주를 공격하려 했다. 종 덕창은 수원도호부 남쪽 30리에 있는 종덕장宗德莊 소속의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이 곳은 현재 평택시 고덕면이다.

고려시대의 장은 처와 더불어 당시의 최고 특권기관인 왕실·왕족·사원에 지급돼 경제 적 토대가 되는 구실을 했는데, 그 안의 농경지는 장을 지급받은 지배자에게 조세를 바치 는 수조지의 기능을 했다. 장은 특권기관에 경제적 재원을 마련해주기 위해 특별히 제정된 군현제 행정조직의 하부단위였다. 따라서 장·처의 주민들은 일반 촌락의 주민과 같이 주 로 자기 농토를 경작하는 자영농이었으므로 왕실·궁원 ·사원의 영지이기는 했으나 왕실 등이 직접 경영하는 소유지는 아니었고 이吏를 매개로 지배하는 단순한 수조지였다.

고려 중기 이후 토지겸병이 진행됨에 따라 수조권자가 수조권의 운영을 통해 농민의 토 지를 매수 점탈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 지역에 흉년이 들어도 정해진 조세를 내게 하고 이를 낼 능력이 없는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다. 고종 대에는 종덕장의 수조지 대다수가 왕실이나 궁원 혹은 사원의 소유지로 바뀌었다. 그들이 수확한 곡식은 종덕장에서 거두어 종덕창에 보관했다가 왕실이나 궁원에 이송됐다. 양곡의 이송은 보통 2∼5월에 행해지므로 진위현민이 종덕창을 습격했던 1월에는 곡식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하양창은 고려 때 충남 아산에 설치했던 12조창 중 하나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위치는 안성천 하류에 위치한 망해산 기슭으로 현재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다. 본래 이곳은 조창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인근지방 세곡을 운송하기 위한 출항기지였으며 조창이 설치된 이후 충청도 전역의 세곡이 수납되는 큰 창고로서 한척에 1,000섬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이 있었다. 하양창은 인근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고 경기도 연해안을 거슬러 예성강 입구의 경창으로 운송했다. 이를 감독하기 위해 외관록 20석을 받는 판관이 배속됐고 운송실무는 창고관리인 향리와 뱃사공·소공梢工·수수水手 등이 맡는 등 국가 재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창 또한 촌락을 기본 구조로 하는 군현의 하부 행정구역이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군현보다 한 단계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조창민은 천민대우를 받아 역 부담이 가중됐다. 따라서 진위현민들이 하양창을 습격했을 때 조창민도 함께 가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양창이 설치되었던 팽성읍 노양리 경양포(2002)

| 하양창이 설치되었던 팽성읍 노양리 경양포(2002) |



주석

48) 『고려사절요』 권15, 고종 4년 정월조.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의병이란 명칭이 나온다. 의병이란 외국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정부의 징병령이 없이도 스스로 일어나 적과 싸우는 구국 의용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