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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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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팽성읍 지역인 평택현은 조선시대 전국 330여 군현 가운데 규모가 작은 현에 속했다.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가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같이 직산천에 있지 않고 진위천을 따라 나뉘었기 때문에 주로 충청도에 속했다. 고려시대 양광도에 속했던 평택현은 1415년(태종 13) 충청우도로 편입돼 현감이 파견됐으며 군사적으로는 홍주진관(지금의 홍성)에 소속됐다.52) 이 과정에서 고려 중기 이후부터 계속되던 속현과 향·소·부곡·처·장 등도 수령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는 직촌直村으로 개편됐다. 고려 때 이 지역에 있었던 백랑부곡白浪部曲도 직촌인 리로 편제됐다.53)

세조 5년(1459) 5월 아산현의 아전이 횡포를 부리고 현의 중심지인 읍치邑治가 풍수지리상 물에 잠길 형세라는 이유로 아산현을 나누어 주변의 온양군과 신창현 그리고 평택현에 나누어 붙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조치가 있은 지 얼마 뒤 황희黃喜 정승의 아들이자 수 양대군의 즉위를 도와 영의정에 오른 황수신黃守身이 아산현 북쪽에 아내 무덤을 쓰겠다는 논의가 조정에서 거론됐고, 아산의 전토를 개인농장으로 바꾸었다는 고발이 올라오게 된 다. 이는 아산현의 분리가 황수신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세조의 총 애를 받던 황수신은 처벌은 면했으며 아산현도 얼마 뒤 원상태로 복구됐다.

평택현은 1505년(연산군 11) 6월 직산·진천·아산현과 더불어 경기도로 이속됐다. 같은 해 11월 진천·직산·아산·평택 등 5개 지역을 성환도成歡道라 해 주요 교통로로 삼아 역 을 설치하고 역승驛丞 1명씩을 두도록 했다. 그러나 1506년(중종 1)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한 평택을 비롯한 4개 현을 다시 충청도로 이속시켰다. 또 임진왜란 중이던 1596년 (선조 26) 전란의 피해가 심해져 평택현을 직산현에 합쳤고 이후 평택 백성들이 현 복구를 요구해 1610년(광해군 3) 2월 다시 복구됐다.



주석

52) 『東國輿地勝覽』 권 19, 平澤縣
53) 한신대학교 박물관, 『평택 송화지구 문화 유적 및 민속조사보고서』, 1998, p.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