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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을 지난 조선의 대로大路 - 역驛·원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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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한 교통로, 즉 역로驛路는 중앙과 지방, 그리고 외국 사이에 사람과 물품이 이동 하는 통로였다. 전국에 걸친 역로를 따라 사람과 물품만 오간 것이 아니라 정보도 같이 움 직였다. 따라서 역로는 국가의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통치 장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역로 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대표적인 교통·통신 시스템이었다. 말이 쉬고 지나는 길 에 역이 있고 사람이 다니고 쉬는 곳에는 원이 있었다.

조선시대도 ‘역로가 곧 국가의 대동맥’이라고 인식해 역과 원을 중심으로 교통통신 체계 구축과 유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 및 한반도 북부, 만주지역과 의 관계가 중요했던 만큼 수도인 개경開京으로부터 평양을 거쳐 의주로 향하는 역로가 발 달해 있었다. 조선은 삼남지역 역로에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쏟았다. 조선시대 삼남지역 에는 고려대에 비해 약 20%에 달하는 역이 새롭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62) 조선은 주요 역에 찰방察訪을 파견하고, 그 외의 역도驛道에는 역승驛丞을 파견해 관리하도록 했다. 이 와 같은 역원제는 조선후기에는 파발擺撥로 변화하게 된다.

조선후기 자료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수도인 한양으로부터 전국 각 방향으로 향하는 9개의 대로에 대한 정보가 있다. 한양에서 서북쪽 의주義州에 이르는 제1로, 동북 쪽으로 경흥慶興에 이르는 제2로가 북쪽으로 향하는 대로였다. 그리고 동쪽으로 평해平海 에 이르는 제3로, 서쪽으로 강화江華에 이르는 제9로를 제외한 나머지 5개 대로는 모두 남 쪽을 향해 있다. 부산釜山에 이르는 제4로, 통영統營에 이르는 제5·6로, 제주에 이르는 제 7로, 충청수영에 이르는 제8로다.

남쪽을 향하는 다섯 대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한양에서 출발한 역로는 한강도漢江渡를 건너 양재역良才驛을 지나 용인에 이른다. 이 역로는 용인에서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진다.
우선 동남쪽으로 양지陽智와 죽산竹山을 거쳐 충청좌도와 경상도를 향하는 경로가 있었으 며, 서남쪽으로는 진위와 양성을 지나 충청우도와 전라도, 경상우도를 향하는 길이 있었 다. 이 교통로가 조선시대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그리고 삼남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가 장 대표적인 길이었다. 정부에서는 수원이나 광주·금천·과천 등의 우회로를 이용하도록 규정할 만큼 양재역을 통하는 길에 많은 물자와 사람이 집중되기도 했다. 이 우회로 중 수원·금천·과천을 지나는 경로는 진위와 양성을 지나는 대로로 다시 연결됐다.63)

이처럼 조선시대 평택지역은 주요 교통로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평택은 삼남대로가 지나는 요충이면서 충청대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예로부터 평택지역하면 가장 먼저 교통을 떠올리게 됐다. 이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하륜의 ‘진위객관 중수기’와 서거정의 ‘객관 기문’,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명재상 맹사성孟思誠이 이곳을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의 수령들이 모여들었다가 소를 타고 오는 노인을 박대했는데 그가 맹사성임을 알고 놀라 달아났다는 인침담印沈潭의 전설, 녹사錄事인 젊은이와 공당 문답을 나눈 곳이 백현원白峴院이었다는 이야기가 실린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허적許績이나 송시열宋時烈이 사직 상소를 올릴 때 진위에까지 올라와서 상소를 올린 사례도 있다.
주요대로가 지나는 평택지역에도 역로망의 주요한 거점인 역과 원이 설치됐다. 『진위 읍지』에 따르면 진위현에 있었던 원으로는 ‘장호원’(진위면 신리), ‘이방원’(진위면 갈곶리), ‘백현원’(장안동과 동막 사이의 고갯길. 희도원希道院이라고도 했음), ‘갈원’(칠원동) 등이 나온다. 역으로는 수원부에서 세종 때 진위현으로 이속된 ‘청호역’(진위면 청호리)이 있었고 평택현에는 ‘화천역’(팽성읍 추팔리)과 ‘상역’(팽성읍 두리)이 있었다. 이것들이 모두 전시대에 걸쳐 존재하면서 기능을 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1843년 『진위읍지』에는 이상의 원이나 역이 이미 없어진 지 오래돼 터만 남아있다고 했다. 갈원과 화천역은 1900년 경부선 철로가 놓이고 제1호 국도가 놓일 때까지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규장각에 1903년 화천역의 역둔토 경작에 관한 문서가 남아있는 것에서 확인된다.

조선후기 이른바 삼남대로의 길 명칭이 가장 자세하게 나오는 『증보문헌비고』, 『도로고』, 『대동지지』, 각종 『춘향전』 및 읍지의 지도 등 옛 기록과 1910년대에 작성된 지도, 그리고 현지답사를 통해 평택 지역의 옛길을 확인할 수 있다.64)
신경준의 『도로고』에 나오는 제6대로 중 제5로는 한양에서 제주로 가는 길인데, 평택 지역 부근만 보면 다음과 같다. ‘오산신점-청호역-진위-갈원-소사-아교천-성환역’ 『대동여지도』의 제작자인 김정호의 지리지 『대동지지』에는 10대로가 나온다. 그 중 해남에 이르는 제8대로가 보이는데, 중밋오뫼가 중미현中彌峴인 것 외에는 차이가 없이 ‘오산점-대백치-갈원-가천-소사점-아교-홍경원’ 등으로 나온다. 『증보문헌비고』의 9대로 중 제6대로는 ‘과천-갈산참-미륵당-유천-중저-청호역-진위’로 돼 있다.

『춘향전』에는 한양에서 남원으로 돌아가는 이몽룡의 암행길이 나온다. 판본마다 노정이 다르게 나오므로 가장 자세한 고래대본을 기본으로 하고 다른 판본으로 보완해 평택 부분 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65 “…화성을 다달아 북문안 언짓 들어 남문 밖 숙소하고, 이튿날 내달아 상류천·하류천·대황교 비껴놓고, 떡전(병점)거리·중미고개·장개울 넘어가니 오미(오산)장터 거기로다. 청외(청호)를 얼른 지나 진위振威읍내·새둑거리·소골 지나 회 계원·참나무정이·감주거리·갈원葛院·소사素沙 말을 몰아 애고다리·개령이·홍경이 지나가니 성환술막·대자거리…”

먼저 새둑거리를 보자. 진위면사무소 남쪽의 봉남교(진위교라고도 함) 양쪽으로 논이 있 다. 옛날에는 봉남교에서 남쪽 산 밑에 주막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주막거리를 ‘새둑거리’ 라 불렀다고 한다. 아마 장마 때 진위천이 범람해 새둑(뚝)을 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이라고 생각된다.
소골은 현재 우곡으로 행정구역으로는 송북동이다. 옛날에는 소씨들이 많이 살아서 그렇 게 불리다가 한자화 돼 우곡이 됐다고 한다. 그런데 현지에 가서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옛 길을 조사해본 결과 실제로는 소골을 지나서 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나오 지 않지만 동막에서 앞의 새둑거리로 넘어가는 작은흰치고개(염봉)를 이용했음이 옛 지도 나 현지 주민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아마 이 골짜기의 대표 지명이 소골이라서 그렇게 기 록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회계원은 일선본日鮮本에만 보이는 지명인데, 소골의 동쪽에서 남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부르는 명칭으로 보인다. 이 고개는 우리말로는 ‘흰치’, 한자어로는 백현白峴, 백치白峙 또 는 염봉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 고개의 흙이 고령토를 연상시키듯이 멀리서 보면 희끗희끗 하게 보인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원이 있어서 백현원白峴院 또는 희도원 喜到院, 또는 希道院으로 불린 적이 있다. 백현원은 고려시대 몽골이 침입했을 때, 적장 살 리타를 죽인 김윤후라는 승려가 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춘향전에서 말한 ‘회계원’이 라는 용례는 없어서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는 이 골짜기의 남 쪽을 ‘텃골’이라 부르고 있을 뿐이다.

감주거리는 장안동 국립한국복지대학교 아래에 있던 주막을 말한다. 이곳 주막의 술맛이 하도 좋아서 ‘감주거리’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칠원은 『실록』, 『진위읍지』 등에 자주 나오는 지명으로 현재는 칠원동이다. 『경기도지』에 어느 임금님이 이곳에서 음식을 드시고 병을 얻어 이름이 갈원葛院에서 칠원七院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신빙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칠원에는 남쪽으로 향해 가던 임금님이 물을 마시고 너무 맛이 좋아서 옥관자를 하사했다는 옥관자정에 대한 이야기가 내려온다. 지금은 갈원의 ‘칡’이 ‘칠’로 바뀌어 칠원동으로 불리고 있다.
소사는 현재 소사동 137번지를 중심으로 한 곳이다. 옛날에는 소사장터로 알려진 곳이나 지금은 지명만 남은 조그만 마을일 뿐이며 나머지는 경지정리로 논이 돼서 더 이상 자세한 것은 확인할 수 없다. 칠원과 소사 사이의 길도 도시화되면서 많이 파괴돼 정확한 노정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상에서 살펴본 조선시대의 교통로를 현재의 지명으로 추정해보면 현 갈곶리(이방원)-청호역-가곡리-한국 야쿠르트-봉남리(진위현 읍치)-마산리-동막-부락산과 덕암산 사이(소골 : 백현원 또는 희도원)-도일동-칠원동-상서재·하서재-비전2동-소사동-애교다리-천안시 성환읍 가룡리-홍경사지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리고 충청수영으로 가는 길은 칠원-상서재-통복동-(나루)-상리-추팔리(화천역)-객사리(평택현 읍치)-둔포로 이어지는 길이다.

주요 교통로가 지난다는 사실은 평택 지역의 백성들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말을 키우고 역과 원을 관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이 지나다녔으니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역과 원에 소속된 백성들의 사회적인 지위도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이 들어와 철도가 놓이고 신작로가 다른 곳에 생겨 기존 역로망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되면서 크게 변화했다.



복원 된 삼남길(평택구간도)

| 복원 된 삼남길(평택구간도) |









[참고문헌]


『大東地志』.

『東國輿地勝覽』.

『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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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62) 정요근, 「조선초기 역로망의 전국적 재편」『조선시대사학보』 46, 2008.
63) 정기범, 「조선후기 충북 동북부의 교통로」 『실학사상연구』 22, 2002.
64) 김해규, 『평택역사산책』, 평택시민신문사, 2013.
65) 이 노정에 대한 문헌 및 국어학적 고증은 이명규, 『서울·경기 지역 지명 및 방언』, 한국문화사, 2000, 212∼213쪽의 견해를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