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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의 소사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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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거의 전국에 걸쳐 진행된 전쟁이었고 한반도의 중요 교통로인 삼남대로가 지나는 평택에도 전쟁 여파가 미쳤다. 전쟁의 흐름을 바꿀만한 커다란 전투는 평택지역에서 있었던 소사평(소사벌) 전투다. 소사평은 지금의 소사동 일대다. 전투 상황을 『선조수정실록』과 『연려실기술』 등을 통해 재구성해 본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은 주력부대를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편성했다. 그 가운데 좌군이 먼저 남해안을 따라 이동을 개시해 8월 7일 구례를 점령함으로써 전라도에 진입했다. 8월 16일 남원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19일 전주로 진격했는데 남원의 함락 소식을 들은 전주 부윤 박경신과 명나라의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이 공주로 달아나자 일본군은 전주에 무혈 입성했다.
1597년 8월 29일, 일본군은 전주를 출발해 만경평야를 지나 익산과 여산을 거쳐 충청도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9월 3일 공주를 점령한 다음 연기와 청주를 거쳐 천안으로 북상했다. 병력의 일부는 진산-금산-옥천-회덕-문의를 거쳐 청주로 진출했다.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면서 경기도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자 명나라의 경리 양호楊鎬는 평양에서 소식을 듣고 경 성으로 달려와 제독 마귀麻貴를 재촉 해 일본군 저지 대책을 의논했다. 제독 마귀는 부총병 해생解生, 유격장 파귀 頗貴·우백영牛伯英, 참장 양등산楊登山 등으로 해금 기병 2천 기를 이끌고 9월 5일 한성을 출발하도록 했으며 유격장 파새擺賽가 지휘하는 기병 2천 기를 증 파해 이들을 지원하게 했다.

부총병 해생이 지휘하는 명나라 군대 는 강행군을 거듭해 9월 7일 새벽 소사 평의 삼거리 부근 야산에 진영을 구축 하고 매복했다. 일본군의 선봉대가 앞 서 전의와 천안을 거쳐 북상하다 소사 평 삼거리에 이르러 명군을 발견하고 선제공격을 가했다.

명군이 포격으로 대항하면서 양 진영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조총 사격과 동시에 장검을 휘두르며 명군 진영으로 돌 진했으나 명군이 동요하지 않고 맞서 백병전을 벌여 일본군에 큰 손실을 입혔다. 이날 오 후, 파새의 기병 2천이 도착하자 명군은 부대를 3등분해 일본군을 협공했다. 명군의 기병 4천과 일본군 보병 5천이 혼전을 벌이는 도중에 일단의 기병부대가 일본군에 증원돼 모두 여섯 차례에 걸친 대접전이 있었다. 결국 기병 위주의 명군이 보병 위주의 일본군을 격퇴 시킴으로써 전투가 끝났다.

일본군은 소사평 전투에서의 패배로 경기도 진출을 포기하게 되고 추풍령과 조령을 거쳐 경상도로 남하하거나 금강을 거쳐 전라도로 남하했다. 명과 조선은 지속적으로 반격했고 일본군은 9월 중순 이후로 접어들면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소사평 전투는 임진왜란 에서 정유재란에 이르는 과정 중 본격적인 육지 전투의 마지막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일 본군이 패배함에 따라 결국 전쟁이 종결되는 과정에 들어가게 됐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는 이때의 전쟁 상황에 대해 조금 다른 기록이 있어서 주목 된다. 즉 소사평에 매복하고 있던 명나라 기병들이 말에 탄 원숭이 수백 기를 함께 숨겨두었다는 것이다. 잠복하고 있던 명군은 일본군이 가까이 이르자 원숭이가 말을 타고 채찍질하면서 일본군에게 돌진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갑자기 나타난 원숭이에 놀라 술렁이는 사이 명군이 기습을 가해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원숭이에 대한 언급이 실록과 같은 정사正史 자료에는 보이지 않아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소사평부근 전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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