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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란의 배경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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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이 혼란한 사이, 만주 지방에서는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등장해 분열돼 있던 여진족을 통합하고 새로운 왕조의 건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다섯 달 뒤인 1592년 9월 조선에 구원병을 파견하겠노라는 의사를 표명할 정도로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는, 견제가 소홀해진 임진왜란 이후 부쩍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1614년 명나라는 누르하치에 대한 토벌계획을 세우고 은밀히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조선에서는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러나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요동 지방을 침입하게 되자,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 사이의 3국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 됐다.

1618년 명이 조선에 군사를 요구하자 조선은 결정해야 할 입장이 됐다. 임진왜란 때 원 병에 의해 큰 도움을 받은 지 2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명의 원병 요구를 거절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감당키 어려운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후금과 대적하는 것도 쉬운 일 은 아니었다. 결국 1618년 7월,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로 하는 1만 명의 출정군이 파 병됐다. 이때 출정군은 느릿느릿 여장을 꾸려 이듬해 2월에야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군대 와 합세했다. 하지만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는 후금에게 섬멸되고 강홍립은 후금군에 투항한다.

하지만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해 외교적 실리론자인 광해군이 실각하고 인조가 집권하 게 됐다. 인조와 서인西人 정권에게 명나라에 대한 ‘숭명사대崇明事大’와 후금에 대한 ‘척화론斥和論’은 중요한 명분이었다. 후금에서는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조선에 대한 강경론을 견 지하던 태종太宗이 즉위했다. 청 태종이 즉위하던 1626년과 이후 각종 사회문제도 호란의 배경이 돼 결국 후금의 제1차 침입인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시작됐다.

1627년 1월 13일, 누르하치의 조카였던 아민阿敏을 대장으로 한 3만 명의 후금군은 압록 강을 건너 의주성을 공격·점령했다. 파죽지세로 남하를 계속하던 후금군은 일주일 만인 20일에 청천강을 건너 안주성에 이르렀다. 한편 조정에서 후금군의 침입소식을 접한 것은 나흘이나 지난 1월 17일이었다.

1월 21일,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지휘하던 안주성을 함락시킨 후금군은 24일 에는 평양, 이튿날에는 황해도 황주黃州에 무혈 입성했다. 안주가 함락되고 적군이 숙천肅川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전해진 24일, 조정에서는 ‘분조分朝’를 단행해 세자와 일부 대신을 전주로 향하게 했다. 1월 26일, 인조의 행차는 한양을 떠나 29일 강화도에 도착했다. 방법 은 후금과 화의를 맺는 길 밖에 없었다. 한 달 여 동안 화의의 조건을 놓고 협상하다가 두 나라가 형제나라가 되며 조선은 후금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내용 등에 합의했고 결국 3월 3일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정묘화약丁卯和約’의 결과를 놓고 청과 조선은 나름대로 불만이 있었다. 조선의 경우 호 란을 당한 사실 자체가 크게 불쾌한 것이었고, 군사력에 굴복해 화의조건을 수락했지만 형 제의 나라가 된다는 것은 치욕적인 것이었다. 해마다 후금에 지불해야하는 많은 액수의 예 물도 피폐한 조선의 경제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후금의 입장도 나름대로 불만은 있었다. 호란이 종결된 이후에도 모문룡 세력이 은밀히 조선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의 배후에서 계속 도발행위가 있었다. 또한 조선은 후금과의 외교 접촉과정에서 은연중 후금을 모독하는가 하면, 후금의 세폐 증액 요구를 거부하거나 감액을 요구하는 등의 반항적 태도를 취해 후금의 의구심을 자아냈다. 후금은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킬 방법을 모색하게 됐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당시 심양에 머무르고 있던 조선의 사신들에게 즉위식에 참석해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다.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 등 조선의 사신들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태종은 일단 이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냈지만, 외교문서의 서식에서 스스로 ‘황제’로 칭하는 등 종전과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외교문서에는 조선이 왕자를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보내 정벌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11월 청 태종은 심양에 온 사신에게 왕자·대신과 척화론자들을 압송할 것을 요구하면서 출병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조선은 이를 묵살했다.

1636년 11월말 청 태종은 조선을 직접 정벌할 것을 선언했다. 청병淸兵 7만 8천 명, 한병漢兵 2만 명, 몽고병蒙古兵 3만 명으로 혼합 편성된 조선 원정군 12만 8천 명은 12월 1일에 심양瀋陽에 집결한 후, 이튿날 출정에 나섰다. 12월 8일, 선봉이었던 마부대馬夫大 기병 6천이 압록강을 건너오면서 청의 2차 침입인 병자호란이 시작 됐다.

마부대는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지키자 방어거점인 산성을 무시하고 우회해 직접 서울을 향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압록강을 넘은 지 6일 만인 12월 13일, 청군은 안주·평양을 거쳐 황주에 이르렀다.

12월 14일, 적군이 개성을 통과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천도할 것을 결정했다. 종묘의 신주를 모신 일행이 세자빈과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원로대신들과 함께 먼저 강화도로 떠났다. 임금의 행차가 남대문에 있을 때 적군이 서울 근교의 양천陽川 부근까지 진격해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방향을 돌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급하게 피신했다.
남한산성에 갇힌 후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명나라의 구원 을 바랐지만 명나라도 조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각도에서 근왕병勤王兵이 진군해 청의 포위망을 뚫는 방법이 있었지만 진군 속도는 너무도 느렸다.

12월 29일, 청 태종과 4만의 군사가 서울에 도착해 남한산성으로 진군했다. 1637년 1월 9일, 최명길崔鳴吉 등이 청과의 강화를 위해 사신을 보낼 것을 청해 허락을 받았지만 청은 조선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최후까지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홍이포紅夷砲를 성안으로 발사하며 한바탕 위력 시위를 벌인 후 태종은 인조가 성을 나와 항복할 것과 척화파 신하들을 잡아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 사이 강화도가 함락됐다. 1월 28일 청 태종의 외교문서를 받아들이고 요구를 수용하게 됐다.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인조가 무릎을 꿇으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조선은 명나라 대신에 청나라와 사대·군신의 의리로 묶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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