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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사회의 성립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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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각 지역의 토성土姓들은 향리직을 독점하면서 강력하게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배구조는 조선전기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사족과 향리층의 분리, 그리고 사족들의 처향妻鄕으로의 이주가 이러한 변화의 주된 원인을 제공했다.

조선정부는 고려시대까지 지방 실권을 장악했던 향리층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향리들에게 주어지던 인리위전人吏位田이 폐지되고, 과거응시도 제한됐으며, 법전에 원악향리元惡鄕吏라는 개념을 도입해 향리층의 권력행사를 제한하려 했다. 기존의 향리층은 향리직을 고수하는 자들과 향리직을 버리고 과거를 통해 중앙관직을 획득하려는 자들로 나뉘게 됐다. 후자가 바로 사족士族, 즉 양반층을 형성했다.

양반층에게는 자신이 토성으로 존재하던 지역을 벗어나 거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후기까지 남아있었던 처가살이(또는 男歸女家)의 오래된 관습 때문이었다. 혼인범위가 동일한 지역으로 제한됐던 향리층과 달리 중앙에서 관직을 하기도 하는 양반층의 혼인은 고향에 한정되지 않았다. 혼인으로 인해 양반층은 자신의 본관, 즉 토성이었던 지역을 떠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해 거주하게 됐다. 또한 중앙에서 관직을 마치고 귀향하는 양반들도 자신의 본관지역이 아닌 처가가 있는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처가살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녀들이 동일하게 재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처가에 아내가 받을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택지역에도 진위나 평택 또는 양성을 본관으로 하지 않는 양반들이 존재했다.

양반이란 명칭은 원래 관직을 문반文班 또는 東班과 무반武班 또는 西班으로 나눈 데서 비롯된 것으로 고려시대에도 사용되던 말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양반은 전·현직 관료뿐 아니라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보유한 자들과 가족들을 모두 포함하는 계층으로 이해됐다. 양반에 대한 법적 기준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열閥閱·환족宦族·훈족勳族 등과 같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양반들은 물론 향반鄕班처럼 지역사회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는 양반들, 그리고 법적 신분은 유지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몰락한 잔반殘班까지 다양한 세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많은 특권을 지속적으로 누렸던 고려시대 귀족들과는 달리 조선시대 양반들은 군역이 면제되는 등의 제한된 특권만을 가졌다. 따라서 양반층은 사회적·문화적 우위를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나타내 보여야만 지배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74)

양반들이 지역사회에서 영도력을 얻고 향리들에 대한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는 요인 을 제공한 것은 왜란과 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였다. 대대적인 왜적의 침입과 수도 함락, 국왕의 피난이라는 유례없는 위기 상황에서 양반을 비롯한 백성들의 구국활동이 빛을 발 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양반들이 각지에서 일으킨 의병은 일본군의 보급로와 후방을 괴 롭혔고 조선군과 명군의 반격 계기를 제공했다. 전란 이 후 조정에서는 의병으로 활약했던 각 지역 양반들의 공을 치하했고 그 결과 지역사회에서 이들의 위상은 크게 상승했다.75)

이런 상황은 평택지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평택지역도 많은 인물 들이 뛰어나게 활약했다. 선무공신이 된 원균과 이정암 등은 국가의 녹을 받던 양반 관료 였고 평택지역 백성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방덕룡과 이운룡 역시 양반이었다. 이들의 활 약과 희생은 평택지역 양반층의 사회적 위상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원주 원씨, 경주이씨가 진위에서 유력한 가문으로 행세하고 온양방씨가 평택에 사당을 세우고 양반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이러한 활약 덕분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에 끌려 간 홍익한의 희생 역시 팽성지역 남양홍씨의 위상을 한층 높여주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 평택지역 양반들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과거급제 양상과 도 연관시켜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위상은 과거에 급제하느냐, 그리고 어떤 관직에 오르느냐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여기서는 과거 급제자들 중 진위현과 평택현에 거주했던 자들을 중심으로 양상을 살펴 본다. 과거에 급제한 양반들을 기록해놓은 방목榜目에는 급제자들의 성명·본관·합격시 기·거주지 등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다.



[진위·평택현 과거급제자의 추이]

(단위 : 명)

[진위·평택현 과거급제자의 추이]



평택지역에서는 16세기에 처음으로 과거급제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17세기 전반까지는 큰 변화가 없다가 17세기 후반에 수가 늘어나게 된다. 즉 왜란과 호란이 끝난 뒤 평택지역에는 양반들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18세기 전반을 지나면서 수가 줄었다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까지는 급제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는 이인좌의 난에 평택지역 양반들이 다수 연루됐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평택지역의 양반들 중 어느 성관姓貫에서 많은 급제자를 배출했는지 살펴본다. 조선시대 평택지역에서 가장 많은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성관은 전주이씨, 의령남씨, 진주강씨, 양천허씨, 원주원씨, 진주소씨 순이다. 이들 성관들 모두 평택지역에 동성촌락(동족촌락)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성관들이 평택지역의 유력 양반들을 배출했다고 할 수 있다.



[각 성관별 대과, 소과 급제자]

(단위 : 명)

성관 급제자 성관 급제자 성관 급제자 성관 급제자 성관 급제자
전주이씨 7 온양정씨 2 밀양박씨 1 청주경씨 1 풍천임씨 1
의령남씨 4 용인이씨 2 순창조씨 1 청주한씨 1 하동정씨 1
진주강씨 4 고령신씨 1 양성이씨 1 칠원윤씨 1 한양조씨 1
양천허씨 3 곤양배씨 1 온양방씨 1 파평윤씨 1 함열남궁씨 1
원주원씨 3 광주이씨 1 의성김씨 1 평산신씨 1 해주정씨 1
진주소씨 3 김해김씨 1 전의이씨 1 풍덕장씨 1 해주최씨 1
경주이씨 2 남양홍씨 1 죽산안씨 1 풍산홍씨 1 행주기씨 1
수원최씨 2 동래정씨 1 진주유씨 1 풍양조씨 1    

*출처 : 문과방목 및 사마방목.
*비고 : 동일인이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한 경우 한 차례로 한다.



이 표에 경주이씨 합격자는 2명에 불과한데, 사실 진위의 경주이씨는 많은 급제자를 배 출한 유력한 양반 가문이었다. 하지만 진위에서 태어나거나 진위에 묻혔더라도 과거시험 볼 때에는 거주지를 경京으로 기록해 놓은 경우들이 있었다. 이세필李世弼의 손자이며 이태 좌李台佐의 아들인 이종성李宗城은 진사시와 문과에 다 급제한 수재였다. 그런데 진사합격 명부에는 거주지가 서울로, 문과합격 명부에는 진위로 적혀있다. 또한 원주원씨의 경우, 문과보다는 무과武科를 거쳐 군관이나 장수로 활약한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 다. 이처럼 일부 누락된 인물들이 있지만, 주요 성관들에 평택의 주요 양반 가문들이 포함 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과거합격 이외에도 양반으로서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어 설령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했다고 해서 평택지역의 양반이 아니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학문적 성 취, 자손의 수, 경제력, 효행孝行 등이 영향을 미친다.76)
위의 표에 나오는 성씨들 중에는 동성촌락을 형성하지 못하거나 평택지역에 자취를 남기 지 않고 사라진 성씨들도 있다. 이 상황은 평택지역의 지정학적 특징을 통해 설명할 수 있 다. 평택은 조선시대 주요대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 는 곳이었다. 많은 양반들 역시 서울에 진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또는 살기 좋은 낙향지를 찾아가는 중간지로 평택지역을 거쳐 갔을 것이다. 더구나 평택지역은 근대화 이전까지 바 다가 육지로 깊이 들어오고 많은 내천이 흘러 농업 생산력이 떨어지는 지역이었다. 경제력 을 키워 과거급제자를 배출하고, 동성촌락을 만들어야 하는 양반들이 정착하기에 평택지 역이 매력적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평택현과 진위현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보면 유력 양반가문을 많이 갖지 못했다. 이는 평택지역 출신으로 조선시기를 통틀어 문과에 급제해 중앙에서 큰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 많지 않았다는 것과 두 지역에 서원書院이 없었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유력한 양반을 갖지 못했다는 점은 백성들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양반층과 일반 백성들은 지역 사회에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조선의 사회 구조다. 특히 평택현은 중앙의 권세가들에 의해 수탈을 많이 당했는데 이러한 행위를 막아줄 지방의 중간 양반층이 약했다.



주석

74) 미야지마 히로시, 『양반』, 강, 1996.
75) 김성우, 「임진왜란 시기 상인층의 동향과 사족층의 대응」, 『한국사학보』 8, 2000.
76) 김성우, 「18~19세기 “지배양반” 되기의 다양한 조건들」, 『대동문화연구』 49,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