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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조선시대 > 조선후기 사회변화와 평택의 양반층 >이인좌의 난(무신난) >난의 배경과 전개
■ 난의 배경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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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부터 격화되는 붕당간의 갈등은 숙종대에 환국으로 이어졌다. 이전까지 공존을 모색하던 서인과 남인은 예송禮訟 논쟁을 통해 갈등했고 환국으로 상대 붕당의 인물들을 처형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여러 붕당 간의 갈등과 희빈 장씨 소생인 경종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시비가 폭발해 경종 연간의 신임옥사辛壬獄事와 이인좌의 난으로 이어진다.

1720년 숙종에 이어 경종이 즉위했다. 경종이 즉위한 1년 뒤인 1721년 8월 20일, 노론계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좌의정 이건명李建命·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청해 허락을 받았다. 명분은 경종에게 후사가 없어 국가의 장래가 어둡다는 것이었다.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는데 성공한 노론은 세제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추진했다. 1721년 10월 10일 집의 조성복趙聖復이 세제의 대리청정을 촉구하는 소를 올 리자 10월 16일 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허락했다. 그런데 소론 계열의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경종에게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했다. 이를 기회로 소론은 노론을 공격해 정권을 주 도하게 됐고, 결국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주도한 세력들은 유배됐다.

1722년 3월 목호룡睦虎龍이 경종 암살 음모를 고발하자 노론에 더 큰 시련이 닥쳤다. 노 론 가문 자제 등 목호룡의 고발 내용에 있던 인물들은 모두 조사받고, 세제책봉과 대리청 정에 참여한 ‘노론 사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 많은 노론 인사들이 처형 당했다. 세제 역시 자신이 거론되자 대죄하기도 했다. 이것이 신임옥사다.

1724년 경종이 갑자기 사망하고 세제였던 연잉군이 왕위에 올랐다. 영조의 즉위로 권력 에서 밀려난 소론 준론 세력은 영조 즉위 직후부터 반대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경종의 시 신을 직접 확인한 이유익李有翼은 ‘경종이 전혀 죽은 사람 같지 않았다’는 말로 타살설을 퍼 뜨리며 동조자를 구했다.

반란 전부터 전국에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 1727년 12월부터 나붙기 시작한 괘서掛書는 1월에는 한양 서소문에까지 걸렸으며 난리가 있으리라는 소문이 세상에 널리 퍼 졌다. 괘서와 소문은 난을 준비하던 세력들이 준비한 것이었다. 3월 14일 봉조하 최규서崔奎瑞가 변란의 조짐을 알리자 그때서야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1728년 3월 15일, 이인좌는 스스로를 대원수를 자칭하고 청주성에서 충청병사 이봉상, 군관 홍림, 영장 남연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했다. 청주가 점령되자 기호지역의 소론, 남인들 200여 명이 청주로 모여들었으며 청주 지역의 군관軍官과 향임鄕任 층도 자 발적으로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 청주 점령에 참여한 자들은 200∼300명 정도였으 나 불만을 품은 여러 세력이 반란군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청주 지역에서 반군이 세력을 크게 불리고 있었으나 이들이 기대하던 영남 및 호남군대는 오지 않았다. 결국 각처의 동 조 세력에 격문을 띄우며 자체 병력만으로 한양을 공격했다.77)

조정은 3월 18일 오명항에게 2천의 병사로 토벌군을 만들었다. 이들은 20일 진위에 진을 쳤는데 그날 밤 오명항을 죽이려고 보낸 자객들이 실패하고 오히려 10여 명이 잡혔다. 정 부군은 22일 안성에서 반란군을 만나 승리했으며, 24일 죽산에서 반란군의 주력부대를 격 파하고 이인좌 등 반군의 지휘자들을 잡았다. 영남 안음에서 이인좌의 동생인 이능좌李能佐 와 정희량鄭希亮 등이 난을 일으켜 거창 등 몇몇 고을을 점령했으나 곧 진압됐고 전라도 태 인에서도 수령으로 있던 박필현이 고을 병사들을 이끌고 난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주석

77) 李鍾範, 「1728년 戊申亂의 性格」, 『朝鮮時代 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 pp. 203∼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