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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혁명과 평택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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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장군

|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장군 |



당시 충청도 행정구역에 속에 있었던 평택지역에서도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농민항쟁의 주도층이 다른 지역과는 달리 농민층이 아닌 지주였다. 한양 사람인 현응선玄膺善이 궁감宮監을 빙자해 평택지역의 논문서를 강제로 빼앗고 저수지를 개간했다. 당시 저수지 아래 여러 논을 가지고 있던 지주 정규원鄭奎元과 정광형鄭匡亨은 농사가 실패할 지경에 이르자 농민항쟁을 주도했다. 즉 농민항쟁의 원인이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아니라 저수지에 대한 송사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동학운동을 결의한 사발통문

| 동학운동을 결의한 사발통문 |



따라서 평택의 농민항쟁은 제언답堤堰畓의 강탈이라는 폐해 외에도 간사한 무리들이 민전民田을 공공연히 탈취하 거나 무명의 세를 강제로 징수하는 것 과, 아산창과 근접한 거리로 인한 연강 沿江 상하의 수세 명목도 폐단이 되고 있었다.

민전을 빼앗은 현응선은 국가의 권위 를 업고 있는 궁감 또는 도장 정도의 수세청부업자나 토호 등으로 보인다.

현응선의 토지 강탈이 양반지주들의 농민항쟁으로 인해 쉽지 않게 됐다. 평택의 농민항쟁 은 정규원·정광원 등의 지주가 주도한 항쟁으로 일반 농민들이 봉기한 농민항쟁과는 달 라서 농민층과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60년 4월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지 2년 뒤 1862년 12월 동학의 교문규제敎門規制를 확장코자 접주제를 처음 시행했고 이때 경기도 접주로 이창선李昌善이 임명됐다. 경기도는 교조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지 2년 뒤인 동학 초창기부터 “각지에 접소를 설하고 접소 에 접주를 두어 기관내도인其管內道人을 통화統化하는 제도”인 접주제를 시행할 때부터 동 학이 전파됐다. 따라서 평택지역도 동학이 창시되고 접주제가 시행되는 1862년부터 동학 이 전파됐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접에서 관할하는 수원 지방의 경우 1893년 3월 최시형의 명령에 의해 접주와 교 인을 포함해 수천 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3년 3월 21일 ‘척왜양창의’라고 쓴 5색 대기 가운데 진위지방 동학교도들의 참여를 알리는 진위접의振威接義 ‘진의振義’라는 깃 발이 있었다. 진위현의 동학교도들이 보은집회에 참가했던 것이다. 경기도 각지의 동학교 도들은 각 지방의 지역 사정에 따라 여러 차례 나누어 접주들의 인솔 하에 집결했다. 당시 참여한 접소로는 진위를 비롯해 수원·양주·여주·안산·송파·이천·안성·죽산·광주 등 11개 지역에 달했다.

전봉준이 재봉기해 반외세 구국항쟁에 돌입했을 때 동학농민군의 주력군은 전봉준의 격 문에 의해 일어난 호남지역의 남접과 2대 교주 최시형의 지시로 일어난 충청도의 북접으 로 구성됐다. 따라서 호남지역을 제외한 경기도와 다른 지역은 북접의 동원체제하에 있 었다. 당시 경기도의 동학교단 조직은 안성 2포·양지 1포·여주 3포·지평 2포·광주 1 포·수원 2포 등 7개 지역에 13개의 포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1893년 3월 보은집회에는 각지의 동학교도가 운집했는데 이때 경기도 지역에서는 평택을 비롯해 수원·안성·죽산·용인·안산·이천·양주 등지의 교주와 교도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들이 고부에서 봉기했을 때 평택지방에서는 봉기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의 평택읍 팽성·송탄·고덕·진위 등지에서 안성군 및 충청도 봉기에 개별적으로 가담한 정도였다. 또한 현덕면의 동학교도가 민간의 총을 모아 충남의 동학농민군에게 제공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합정리의 최규경崔奎卿은 접주는 아니었지만 평택의 대표자격으로 동학 농민군에 대한 제반 사업을 지원했다. 이후 고덕면 문곡리의 김승구는 독실한 천도교 신자로서 1919년 3·1 운동 당시 마을민을 부추겨 독립만세를 부르는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평택현을 포함한 충청도 지역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동학농민전쟁 초기 동학농민군 지도부를 이룬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남접 계통의 영향력이 적은 곳으로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주된 활동무대로 알려지고 있다.



1차 봉기도

| 1차 봉기도 |



1차 동학농민 전쟁기에서 2차 동학농민 전쟁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별다른 활동은 부각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충청지역에서도 동학농민전쟁 초기 남접 동학농민군 지도부와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동학농민군 조직들이 있었고, 그들은 북접 교단의 지휘를 받던 동학농민군 조직과는 성격이 달랐다.

집강소 시기에 각 지방에서 동학농민군들이 보부상을 자기 편에 끌어 넣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때 진위군에서 보부상들이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사실이 있다. 『동학란기록』 상권에 수원의 접주인 김래현金來鉉이 창궐할 때 동학이 어떤 학문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민공익閔孔益·한홍유韓弘儒·김명수金命壽 등이 형제들과 함께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 곤욕을 치른 기록이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공주에서 대패하자 동학농민군에 가담했던 보부상들이 모두 전향해서 관군측에 가담해 동학농민군의 잔존 부대를 진압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2차 봉기도

| 2차 봉기도 |



2차 동학농민군 봉기 시 북접지역에서는 주로 순수한 동학교도들이 참여했는데, 그 세력이 극히 강대하다는 일본군 정보에 따라 일본군은 이미 충청도 각읍의 동학당 수령 내 지 집강소 명단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그 명단에 평택의 김용음金鏞音 또는 김용길金鏞吉 이 있어 평택에서도 농민군의 활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평택 지방에서는 동학의 보급이 미약해 평택·팽성·송탄·고덕·진위 등지에서 안성군 과 충남의 호서 봉기에 개별적으로 참가한 사실이 있다. 동학교도들이 농민들에게 큰 자극 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