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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일전쟁과 평택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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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만에서 일본해군에 격침된 청군 고승호(1894.7.25)

| 아산만에서 일본해군에 격침된 청군 고승호(1894.7.25) |



청나라 군병력은 조선정부의 공식 요청으로 1894년 6월 5일 1차 병력 1,500명을 아산에 상륙시켜 성환에 주 둔하면서 동학농민군에 대응했다. 반 면 일본은 청과 체결한 톈진조약을 구 실로 만 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했으며 부산·인천 등 항구 주둔 병력까지 합 치면 약 2만 명에 이르렀다. 평택지역 의 일본군은 소사벌에 주둔해 청군과 대치했다.



성환전투직전 일본군의 전투대비(1894.7.29)

| 성환전투직전 일본군의 전투대비(1894.7.29) |



1894년 7월 23일 일본의 쾌속 순양 함 3척이 아산만 일대를 정찰 중에 충 청도 풍도豊島앞바다에서 청의 군함 제 원호濟遠號와 광을호廣乙號 2척을 발견 하고 대포를 쏘며 공격했다. 제원호는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를 내고 도주했 으며 광을호는 선체가 크게 파손돼 해 안에 배를 정박시키고 생존자를 상륙 시킨 뒤 폭파해 버렸다.
이 풍도해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 환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 국기를 단 청의 운송선 고승호高陞號가 일 본군에 발견됐다. 고승호에는 1,200명의 증원 병력과 야포·산포 밑 다량의 군수품이 선 적돼 있었다. 일본군이 공격을 가하자 호위암이 항복하고 운송선도 격침당했다. 청의 1,200명 군사 중 147명만이 생존했고 수많은 군수물자가 상실돼 성환에 주둔 중인 청군에게 막대한 피해와 손실을 주었다. 풍도해전으로 기선을 잡은 일본은 경인지역 병력을 아산만으로 증파해 청군을 대상으로 청일전쟁을 시작했다.



일본군이 진지를 구축했던 소사벌(2013)

| 일본군이 진지를 구축했던 소사벌(2013) |



풍도해전에서 천여 명의 증원군과 군수물자를 잃은 성환의 청군은 고립상태에 빠지게 됐다. 청군은 남하하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성환에 진을 치고 일개 부대는 공주를 점거해 수비하기로 했다. 먼저 청군은 성환 동북의 월봉산 고지를 주진지로 삼고 포병대는 서남의 높은 산 정상에 배치했다. 이때 일본군의 선봉이 평택에 가까운 소사장素砂場에 도착해 청·일 양군은 이제 안성천 교량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1894년 7월 27일 새벽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그러나 안성천 교량근방에 매복해 있던 청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혼란에 빠져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됐다. 당시는 농번기라 안성천 유역에 있는 전답에 물을 대기 위해 보洑를 만들었고 이를 군두보라고 했는데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선봉대가 군두보에 빠져 전멸했다. 군두보는 일본군이 몰사했다는 뜻 으로 ‘몰왜보沒倭洑’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대평택교(현 유천교)와 옛 군두보 터(2013)

| 대평택교(현 유천교)와 옛 군두보 터(2013) |



청군은 성환과 공주로 병력이 분산됐고 풍도해전에서 많은 병력이 손실됐으나 본국의 판 단 실수로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군은 소사벌에 소수의 병력으로 진을 쳐 청군에게 허약함을 보이고 안심케 한 다음 야음에 청군을 포위한 뒤 새벽에 기습공격을 가 해 청군을 섬멸했다. 이때부터 소사벌 평야를 청군이 망했다는 뜻에서 ‘청망평淸亡坪’이라 불렀다.

1894년 8월 1일 일본의 대 청 선전포고로 청·일 양국은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제 국주의 열강들이 중립을 선언한 가운데 양국의 잔여부대들은 평양에 집결해 격돌했다. 일 본군이 대승해 요동까지 진격했고 해전에서도 일본군이 황해·여순 등지에서 연전연승했 다. 요동에서도 일본군이 승리하고 1895년 4월 7일 시모노세끼 조약 이후 조선에 대한 일 본의 영향력은 증대됐다.

소사벌 전투는 당시 평택지역에서는 일본군이, 성환 등 충청권은 청군의 영향 하에 벌어 져 평택지역에 인적·물적 피해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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