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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의 교육 구국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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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공립소학교의 현재 모습(진위초등학교)

| 진위공립소학교의 현재 모습(진위초등학교) |



1899년 2월 1일 진위군 현내면(진위면)에 3년제 학교인 진위공립소학교振威公立小學校가 설립됐다. 진위공립소학교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선구적 역할을 했고 최초 교원으로 이교홍이 부임했다. 이후 1904년까지 교원은 신구완·김동진金東珍·김도묵金道黙·박형철朴馨哲·박병덕朴秉德·유운혁柳運赫·김현구·윤대선尹大善 등이었다. 이 중 윤대선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진위공립소학교 다음으로 1904년 팽성읍 남산리 강난수姜蘭秀의 사랑방에서 시작하여 1913년 평택공립보통학교(현 성동초등학교)로 가 설립됐다.
1906년 고덕면 율포리에 거주하는 전 승지承旨 이범창李範昌과 이범철李範喆 형제는 당 시 조선이 살아갈 길은 후손에게 교육을 시킴으로써 실력을 키우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해 진흥의숙振興義塾을 설립하고 40∼50여 명의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또한 진위군 수 백남규白南奎와 상의해 한남흥학회漢南興學會를 조직하고 교육, 식산 방침과 지방 자치 제도를 연구했다. 이범철이 작성한 흥학회 취지서에는 “국권회복을 위해 세계정세에 상응 한 보통 지식을 일반 국민에게 주입시켜 실력을 양성해야함은 국가의 막중한 임무이자 국 민의 절대적인 의무이다. 또한 소학교를 수학한 연후 개인의 자유에 따라 전문학교, 고등 학교, 실업학교에 진학하고자 하는 자에 대해 국가는 전력으로 장려해야 한다”고 역설했 다. 진흥의숙을 졸업한 인물로는 일제강점기 언론인·역사학자·항일 독립운동가로 활약 한 안재홍이 대표적이다.

종교계 학교로는 1906년 수원성공회 지부가 부용면 객사리(현 팽성읍)에 창립됐다. 이 곳에 성공회 신명 강습소를 설립하고 교사 2인이 생도 40여 명에게 가르쳤다. 이 학교는 1920년까지 유지됐다.
1907년 수원군 북면 백봉(현 청북면 백봉리)에 사는 전 참봉 서상천徐相天이 자본금 5천 원을 들여 수성학교須成學校를 설립하고 인근 청년자제들을 모아 신학문을 교육했다. 당시 교장은 서상천, 찬성장은 군수 이완용李完鎔, 교감은 전 주사 서상긍徐相兢이고 교사로는 서상춘·천영호·김한규 등이며 한문과 일본어 등을 가르쳤다.

1907년 진위군수 김영진金英鎭은 각 면에 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김영진이 돈을 출연해 하북면 가곡리에 진문소학교振文小學校를 설립하자 많은 학생들이 지원했다. 김영진은 학부學部에 진위군의 관둔官屯 잉여금을 공립학교에 지원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진문소학교는 설립한 지 6개월 만에 학생이 56명으로 늘어나 교사校舍가 부족해지자 이 기찬李基燦 등이 지역 유지들과 협의해 반서양식으로 교사를 건축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기찬과 권동석 등 8명은 유지회를 조직하고 학교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진문소학교는 1908년 2월 6일 학기말 시험에서 성적 우수학생들을 표창했다. 고등과 갑 반에서 우등생은 권산출, 급제생은 이상업 등이고 을반에서 급제생은 이천록 등이었다.
심상과에서는 우등생이 권영일이고 급제생은 권뇌천 등이었다. 시상식에는 진위군수 김 영진을 비롯해 교장과 학교 임원 및 학부형 등 100여 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군 수 김영진은 청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사범양성학교師範養成學校를 설립하고 교사 건축을 추진했다.

진위군의 교육 구국운동이 확산되자 진위군에서는 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해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진위공립학교 설립 및 진위향교 수리를 위해 군수 김영진 외 지역 유지들이 1,680환을 모금했다. 진위공립보통학교 설립 기부금이 모여지자 군 주사 윤병위尹秉緯와 이호영李鎬榮 등은 진위공립보통학교 설립을 발기했다.
진위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자 1908년 1월 본과 훈도에 이필선李必善 전과專科 부훈도에 이효철이 각각 임명됐다. 2월 29일 정범시鄭範時로 교체됐고 1910년 3월 30일 진위군수 김복규가 교장을 겸임했다.

진위공립보통학교는 이후 1938년 4월 1일 진위공립 심상소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43년 4월 진위공립초등학교가 됐다. 1909년 진위군 우편국 주사 유준홍이 사랑채를 수리해 노동야학교勞動夜學校를 병설했다. 개설 보름 만에 학생이 5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주민들의 호응이 좋아 유준홍은 교사 유정기·김정현 등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진위군 일서면 마두리(현 서탄면 마두리) 이병철이 교육운동에 동참하고자 사숙私塾을 세워 수십 명의 학생을 교육했다.

이외에도 1909년 진사 김춘희가 진위군 병파면 조개터 최모 씨의 사랑채를 개조해 동명의숙東明義塾을 설립하고 40명의 학생들을 모집해 교육했다. 동명의숙은 보통과 2년제와 고등과가 있었고 한문과 신학문 외에 일본어도 가르쳤다. 주민들이 동명의숙 유지를 위한 의연금을 모금했는데 진위군수를 역임하고 안성군수로 옮긴 김영진이 20원을 기부했으며 새로 부임한 진위군수 김복규金復圭도 적극 후원했다. 이후 동명의숙은 교무가 확장되고 번창했으나 설립자 김춘희金春熙가 사망하자 교세가 기울어 폐교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숙장塾長 신석申錫과 숙감塾監 박준국朴準國이 서울에 있던 이재영을 교사로 초빙해 학교시설을 확장하고 학교 내에 노동야학교를 병설했다. 노동야학교 학생 수는 주야를 포함해 80여 명에 이르렀다.

1910년 4월 17일 진위군 서정리사립진동학교 제1회 졸업식에서 갑반의 졸업생 6명 중 심의학, 홍학유, 이익종 등 우등생이 3명이었으며 을반은 박만복 등 우등생 3명, 병반 또한 윤승용 등 우등생 3명이었다.
평택지역의 교육 구국운동은 교육 구국사상의 이념 하에 민족적 자주의지 계발과 민족 실력 양성을 목표로 진흥의숙振興義塾·진문소학교振文小學校·진동학교振東學校·동명의숙東明義塾 등 이른바 민족계 사학이 중심이었다. 이러한 평택지역 교육 구국운동은 당시 전국적인 교육 구국운동에 일정 역할을 담당했다. 동시에 평택지역에서 진흥의숙 출신의 안재홍과 진동학교 출신의 이익종 등이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 간부로 육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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