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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청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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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운동


평택지방에 평택소년회와 경성애우소년학우회 진위지부 등 2개의 소년운동단체가 창립돼 소년운동을 전개했다.
평택소년회는 원래 1923년 10월 경 평택소년야구단으로 조직됐으나 1924년 4월 평택소년회로 바뀌었다. 회장은 김수혁이었고 회원은 38명이었는데 1925년 10월 김귀갑이 총무 를 맡았다. 평택소년회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매년 여름 중선中鮮소년정구대회101)를 개최해 경기도 전체의 체육활동 46회 중 4회(8.7%)를 기록함으로써 단위 소년운동단체로 는 수원소년군과 더불어 동률 수위를 차지했다. 평택소년회는 강연회도 개최해 민중계몽 에도 앞장섰다. 1925년 12월 조선소년군 경성총본부에서 조선소년단의 취지를 선전하기 위해 활동사진대를 조직하고 남선지역을 순회할 때 평택소년회는 평택체육회와 공동으로 12월 27일 활동사진회를 개최했다.102)
경성애우소년학우회 진위지부는 1927년 4월 이전에 조직돼 활발한 소년애우운동을 전개 했다. 1930년대 이후 진위소년동맹은 기남소년단체지도자협의회 개최, 어린이날 축하 행 사 등을 논의하는 활동이 있었다.103)



청년운동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을 전환하자 한국에서의 민족독립운동은 점진주의와 급진주의로 양분됐다. 국내에서의 경향은 점진파의 개혁주의 가 지배적이었다. 이에 민족의 실력양성 및 단결을 궁극적인 민족독립에 결부시키려는 계 몽주의적 민족주의 제 운동이 대두했다.
당시 청년운동단체는 활동에 있어서도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지방 문화의 중추기관이 돼 교육열을 왕성케 하고 신사상을 확립케 했으며 경제적 권리를 회복케 하는 활동을 했다.
1920년대 경기도 지역은 모두 2부·20군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특히 수부首部인 경성부 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청년운동이 진행됐다. 경기도 지역은 1919년 이전 평택 지역을 비롯해 인천·개성·고양·광주·용인·수원·강화 등 지역에서 구락부·당·회 등의 명칭을 가진 청년단체가 조직돼 있었다. 1920년대에 청년회라는 명칭으로 경기도 전 지역에서 청년단체가 조직됐는데 이 단체들은 대체로 계몽적, 교육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경기도 지방의 청년운동단체들은 주로 야학회·강연회·토론회 그리고 체육·연예·오 락 및 기타 산업을 장려하는 활동을 했다. 야학회는 노동에 종사하는 소년이나 청년들부터 연령관계로 취학할 곳이 없는 일반 청년 또는 무산아동들을 적게는 30명에서부터 많게는 300∼400명씩 모아놓고 무보수로 가르치는 것이었다. 강연회는 청년들 간의 신학문에 대한 자극과 일반 민중의 교화·계몽을 위한 것이었다.
토론회도 청년 간의 지식계발과 일반 민중 교화에 크게 공헌한 활동이었다. 같은 주제를 놓고 가편과 부편으로 나뉘어 각각 2∼3명씩 나와서 토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체육활동으로는 주로 야구·정구·축구 대회를 많이 했는데 궁술대회나 야행등산 같은 특수한 활동을 하는 단체도 있었다. 연예·오락 활동은 단지 군민만을 위한 것이나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그 지방의 풍속개량이나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했다. 빈민구제나 교육기관 내지 청년회관 건축 같은 것을 돕기 위한 기금모금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청년회에서는 경제적 지식 보급에 노력하고 근검과 저축, 여러 가지 부업을 장려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해旱害구제활동과 위생계몽활동 및 일반 청년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미신 대신에 과학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각종 문고를 설치하거나 회보 또는 기관지를 발행했다.
평택지역 청년운동단체는 진위청년회가 1917년경 구락부로 창립했다가104) 1919년 3·1 운동 당시 해산됐고 1921년 6월 11일 류창근·신찬우 등의 발기로 다시 조직됐다. 이후 진위청년회는 1926년 9월 혁신총회에서 이해두·정인원 외 4명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됐고, 1927년 10월 9일 정인원·김영개·이해두 등 3명을 새로운 위원으로 선출했다. 1928년 5월 청년야학을 설치해 노동에 종사하는 소년이나 청년과 연령관계로 취학할 곳이 없는 일반 청년 및 교육열이 있어도 배울 곳이 없거나 배울 곳이 있어도 돈이 없어 못 배우는 사람들을 모아 가르쳤다.
진위청년회는 아동 500명을 남자는 1·2·3부로 나누어 가르치고 여자는 1부로 가르쳤는데 부족한 경비는 소인극을 열어 들어온 수입금과 찬조금을 통해 조달했다.105) 1930년 10월경 진위군 송탄면 모곡리에서도 청년들이 야학을 설치했다. 이들은 4지역으로 나뉘어 문자 보급반을 만들고 남녀 각각 50명을 모집해 개강했다. 야학의 경비는 한 달에 3번 휴강일에 남녀 학생들이 모여 가마니를 짜서 공동판매한 수익금으로 조달했다. 강연회도 개최해 일반 민중계몽에 노력했으며 시민연합운동회를 개최해 체육·건강 사업에도 노력을 기울였다.106)
평택청년체육구락부는 1921년 5월 15일 병남면 평택리에서 평택의 체육발전을 목적으로 창립됐다. 당시 임원은 부장 류창근, 부부장 신찬우, 간사 장윤식 외 1인이었다. 평택청년회도 1921년 5월 15일 창립됐는데 류창근·신찬우·장윤식·김정현 등이 대표자였다. 이 후 1926년 9월 12일 이해두 외 6명의 위원이 당선됐다.
오성부인회는 1923년 5월 창립돼 현모양처와 풍덕개선風德改善을 목표했는데 최초의 회 장은 김대경이었다. 진위구락부는 1927년 6월 12일 현덕면에서 창립했다. 진위구락부는 지·덕·체를 장려했는데 당시 임원은 위원장 이조헌, 학예부장 이민복, 경리부장 이국헌, 서무부장 이민행 등이었다. 107))
경기도 지역의 청년운동단체와 활동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급격히 약화되기는 했지만 당시 청년들은 청년운동단체를 조직하고 상호 단결해서 지를 수하고, 덕을 양하며, 체를 연할 뿐 아니라 부업을 장려하고 환난을 상구하며 또 위생에 노력하고 풍기에 엄 숙을 기하고 나아가 민족의 자주독립을 꾀했다.



주석

101) 『동아일보』 1925년 8월 11일자.
102) 『조선일보』 1926년 1월 6일자.
103) 『조선일보』 1931년 4월 19일자 및 『동아일보』 1931년 4월 24일자.
104) 『매일신보』 1917년 5월 27일자.
105) 『조선일보』 1929년 10월 8일자.
106) 『조선일보』 1931년 2월 11일자.
107) 『동아일보』 1927년 6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