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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 세력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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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폭동이 일어났던 송탄동 가재마을

| 농민폭동이 일어났던 송탄동 가재마을 |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해방운동은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로 나뉘어서 전개됐다. 조국이 해방되자 두 계열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독립투사를 자처하며 정치기반 형성과 정국 주도권 장악에 집중했다.
초기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는 일본 유학생들이 시작했다. 일본 유학생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사상으로 받아들이고 국내의 청년과 지식인층에 전래했다. 대중조직으로 1924년 조선노동총연맹과 조선청년동맹이 조직됐고 1925년 국내에 제1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돼 활동했다.
1926년 결성된 제2차 조선공산당은 6·10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붕괴됐 다. 바로 제3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돼 조선노동총연맹·농민총연맹·청년총 연맹 등으로 나뉘어 활동했고 신간회 와 근우회 같은 민족협동전선에도 적 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일제의 강력 한 탄압으로 노동자 출신인 차금봉이 제4차 조선공산당을 결성했으나 명맥 만 유지하다가 1945년 해방 이후 각종 단체를 결성하고 정치일선에 나타났다.
평택지역은 1945년 이후 좌익세력의 준동이 심했던 곳으로 유명했다. 해방 후 혼란한 상 황에서 치안유지는 자치대라는 단체가 맡았다. 자치대 구성원은 일제강점기 경방단원으로 주요간부는 박종화와 이문영이었다. 또한 1945년 8월 22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 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전국에 지부를 두었다. 평택지부는 9월초 결성돼 평택지역의 치 안을 맡았다. 평택지부 위원장은 이민항이 맡았다. 그러나 평택지부는 바로 해산됐다. 평 택 출신인 안재홍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탈퇴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좌익 중심 의 인민당과 사회주의 중심의 공산당파로 나뉘면서 자연히 사라졌다.
이어 인민위원회가 결성됐다. 인민위원회의 주도 인물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일본 유학 지식인들이었다. 인민위원회는 평택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청년동맹과 여성동맹을 만 들고 치안유지·적산관리·친일파 숙청·우익단체 억압·신탁통치지지 등의 활동을 했다.
이 시기 미군정 평택 치안책임자이었던 파악스 상사는 국제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중 립정책을 유지했다. 평택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들의 대두가 쉬웠고 기세를 올릴 수 있었 다. 여기에 평택경찰서 사법주임인 최문진이 좌익에 앞장서 사회주의 세력들에게 더욱 유 리한 분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최문진은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와 철도노조 및 전국산업체 총파업사건이 있을 때 평택경찰서 푸락치 사건을 일으킨 주모자였다. 당시 최문진은 평택지역 폭동에 무 기를 은닉시키고 지원했다. 사회주의자들은 토지의 무상분배라는 감언이설로 농민층의 호 응을 얻었다. 평택군 송탄면 가재리에서 일어난 농민폭동은 인근 칠원리까지 전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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