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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익단체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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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년군 평택연대


지역에서 좌익세력들이 기세를 떨치자 우익세력들도 단체를 조직하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사회주의에 동조하지 않거나 일제강점기 공무원을 지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자본주의자로 매도됐다. 이 상황에서 우익세력들은 치안유지 명목으로 미 군정장관의 승인을 받고 1945년 10월 조선관에서 조선소년군 평택연대를 결성했다.
각 면의 대표로 구성된 정부대장은 이양수·최준화·차관영·이종상·이철훈 등이었고 간부급대원은 안성조·홍순객·김택권·강태근·김병길·강영길·허순호·강완형 등이었다. 일반대원은 17∼20세까지의 청소년 100여 명으로 구성돼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고 애향심을 배양해 치안유지 협조활동에 주력했다.
조선소년군 평택연대는 좌익세력들 폭력에 진압활동도 하고 우익단체 활동에 밑바탕이 됐다. 1945년 12월 29일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우익세력들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가해 별동대의 역할을 담당했다.



반탁군위원회


전국적인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시작되자 중앙에는 지휘본부가 조직됐고 각 지방에는 시·군위원회가 조직됐다. 평택군은 1946년 반탁군위원회가 조직됐다. 위원장은 황경수, 핵심간부는 김용석·김준석·이양수·최병규·김명복·최준화·이삼규·차관영·이귀임·서정희·조성하·이철훈·이덕경·이진훈·이행규·김정학 등이었다.
중앙 및 각 읍면 조직연락책은 안석옥이 맡았고 각 읍면에는 정성묵(송탄)·양재현(진위)·서태원(오성)·홍성억(서탄)·현종철(고덕)·안병욱(청북)·박윤양(포승)·정하면(현덕)·방달용(팽성)·황봉재(안중) 등이 주도했다. 조선소년군은 반탁군위원회의 별동대 임무를 수행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평택지부


1946년 2월 하순경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평택지부가 결성돼 각 읍면과 마을지회까지 조직을 정비했다. 평택군 지부장으로는 김준석(1대)·최명환(2대)·황경수(3대)·안익선(4대) 등이 역임했다.
중진간부는 김용석·조성하·이진훈·홍인균·이성삼·박영환·김완석·장정순·김영보 등이었고, 각 읍면 지부장은 정성묵·이규집·정재덕·변학기·박태서·조용묵·방달용·정만수·송병순·홍인균·홍성억 등이 활동했다.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평택지부


1946년 2월 하순경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평택지부가 결성됐다. 초대 위원장은 최준화, 핵심 임원들은 최병규·김명옥·이철훈·이덕경·차관영·조돈세·조정행·조성행·이 재옥·유충의·김정학 등이었다. 특히 양재현은 경기도 연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읍면은 한상복·차영기(송탄면), 고종락·정성순·차황룡(진위면), 한광수·황성철(서 탄면), 현종철·한진수(고덕면), 유희준·안병욱(청북면), 최순옥·손세균(오성면), 공경 인·유지명(현덕면), 이군상(포승면)·이종린·정태진·방구용(팽성면) 등이 활동했다.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은 평택에서 대공별동대를 조직하고 서북청년단원 오혁·박영찬· 김광택·이성삼·김두찬 등 5명을 초청해 특수임무를 수행케 했다.



대한독립촉성부인회 평택지부


1946년 2월 하순경 대한독립촉성부인회 평택지부가 결성됐다. 이화수·이귀임·노순 용·서정희·안성운·유연흥·김주선·최혜원·김순덕 등이 회장과 간부 및 주도세력으 로 활동했다.
평택지부는 대개 청장년층으로 각 읍면을 조직했고 부녀자들의 독립사상 고취 계몽운동 을 전개했다. 남성들 못지않게 좌익 부녀동맹과 대결하는 한편 청년 별동대원들의 급식을 뒷바라지 하는 역할도 했다.



전국학생총연맹 평택지부


1946년 8월 전국학생총연맹 평택지부가 결성됐다. 위원장은 박기원, 간부는 신수호·봉 명근·최옥·김선·조성수·김병국 등이었다. 각종 임원들은 중학교 학생 약 50여 명으 로 구성됐다. 과격 학생들을 선도하거나 평택군내 학생상호간의 단결에 주력했다.



대동단청년단-평택군단부122)


단장 유정완, 부단장 이병묵, 최병규, 사무국장 차관영, 총무부장 이영구, 차장 김제현, 조직부장 김진옥, 차장 조돈혁, 선전부장 이덕경, 차장 박기형, 훈련부장 이철현, 차장 강완형, 동원부장 조돈세, 청년부장 안석옥, 연락부장 홍순용, 재정부장 조승행, 차장 김재선, 감찰부장 이철훈, 차장 유충의.
각 읍면 주도 간부 송탄읍 단부 한상복, 이명호, 차영기, 박응두, 조남교, 오춘환, 노명우, 현기철, 엄익중, 김영준, 이승재, 김학수, 정명화, 현순기.
진위면 단부는 양재현, 고종락, 이상순, 이상호, 이완재, 조한오, 권형식, 박옥성, 이용찬, 이율재, 차용근, 유제방, 김영식, 라흥열, 정화용, 권오형, 이남석, 신례순, 한상윤, 이종원.
서탄면 단부 한광수, 홍성철, 차상운, 양재홍, 이호용, 조귀석, 송광섭, 정해운, 차종태, 조병덕, 차상봉, 이영우, 이종호, 서장환, 최양집, 홍응표, 서경환, 유래순, 서경남.
안중지구 단부 정시우, 김정현, 황종운, 오진환, 최순옥, 이준기, 심언구, 정두진, 김사학, 한영희, 조경행, 조승재, 배성인, 김윤식, 박상인, 이필섭, 김건식, 김효식, 김춘환, 이용우, 조돈을, 조한용.
팽성면 단부 강경원, 이종린, 방세용, 박세황, 정영섭, 이중형, 방훈재, 최명준, 이건순, 방성용, 이성구, 이남훈, 김세경, 유인열, 김택근, 김범현, 김인식, 정태진, 고형흥, 이건만, 송대영.
고덕면 단부 조병구, 송창용, 김종완, 문재각, 이범희, 한진수, 염두호, 김종혁, 박홍식, 최창열, 김동욱, 모창성, 안진용, 박재엽, 안재선, 김덕용, 허융, 김종구. 현덕면 단부 황종찬, 이근택, 조성극, 노병수, 정경수, 신현택.
오성면 단부 손세균, 진영환, 백낙봉, 손덕균, 이영규, 김용석, 김원일, 조경행, 조성균, 안병천.
포승읍 단부 이병찬, 이익헌, 이군상.
청북면 단부 안병욱, 강대인, 이민선, 최승군, 라기환.



민족청년단-평택군단부


이사 이휘종, 이규헌, 이삼규, 최종환, 이각현, 김용석, 박남규, 단장 김태권, 부단장 오혁, 총무부장 이상옥, 조직부장 번채석, 훈련부장 우윤종, 재정부장 이휘종, 문화부장 이복규, 선전부장 윤성의, 부장 이상무, 김황.



대한독립청년단-평택군단부


대한독립청년당은 서상천이 결성한 단체로 평택군단부는 1947년 12월 결성됐다. 단장은 이철훈이 맡았고 대동청년단원 일부가 가담했다. 이후 극우노선을 지향하고 대공투쟁을 했다.



호국군중대


호국군은 미군정이 국방경비대를 보강할 목적으로 창설한 여단 규모의 부대였다. 호국군 사령관은 상해 임시정부 광복군사령관을 역임한 오광선이었다. 연대본부는 수원에 있었고 연대장은 홍수환이었고 평택에는 중대가 창설됐다. 평택 중대장은 팽성면 출신으로 대한 독립촉성청년연맹에 참가했던 강경원이었고 간부후보 장교는 오혁·김흥식·이철훈·조 동환·이복규 등이었다.
호국군은 예비역과 같은 임무였기 때문에 국고지원이 미비해 자체보급에 의존했다. 월권 행위가 많았고 행정관서와 마찰도 있어 군민들의 지탄대상이 됐다. 또 호국군은 모병제로 지원병제도였으나 강제소집영장을 발부해 군민들의 반발과 각 청년단체들과도 마찰이 있 었다. 호국군은 곧 해체됐으며 호국군 장교들은 청년단 배속장교들과 같이 청년방위대를 거쳐 국민방위군에 편입됐다.



대한청년단 평택군단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산재한 청년단체를 통합시켰다. 대동청년 단·광복청년회·조선청년총연맹·건국청년회·서북청년회·조선민족청년단 등 각 청년 단체들의 통합운동이 추진됐다. 1948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됐다. 대한청년단은 정부에서 관할해 초대 단장에 안호상(당시 문교부 장관)이 취임했다.
대한청년단 평택군단부는 1948년 12월 하순경 결성됐다. 평택군 군단장은 차원영, 주도 간부는 이철훈·이덕경·김진옥·이병묵·우윤종·김제현·장복환·심송룡·이영구·신 주남·박세홍·김필·김옥유·안성만·김각식·김장묵·전석홍·홍순객 등이었다. 각급 간부들은 대동청년단 간부진들이 맡았다.
정부는 대한청년단이 향토예비군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대통령령으로 대한청년단은 청년 방위대가 됐다가 이후 국민방위군으로 발전했다. 대한청년단 간부단원은 단장의 심사를 거쳐서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에 입교해 1개월 간 군사훈련을 수료했다. 수료한 간부는 예 비역 소위로 임관시켜 청년방위대 각급 지휘관으로 배속했다.
청년방위대는 광복군편제를 모방해 총사령부을 설치하고 각 도에는 단(여단급)을, 각 군 에는 지대(연대급)를 각 읍·면에는 편대(대대급)를 두고 그 밑에는 중대로 조직했다. 평 택군은 안성군을 합해 제4지대가 있었는데 지대장은 차관영이 맡았다. 편대는 안성·안 중·서정리 등 3군데 있었으며 대원은 대한청년단원 중에서 지원한 사람들로 충원했다.

주석

122) 건국청년운동협의회, 『대한민국 건국 청년운동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