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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익단체 활동과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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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단체들과 청년운동의 중심지였던 평택우시장 터(현 원평동 평택초등학교)

| 사회운동단체들과 청년운동의 중심지였던 평택우시장 터(현 원평동 평택초등학교) |



평택 우시장 사건


반탁과 찬탁의 사회적 혼란속에서 1946년 5월 중순 경 좌익세력인 평택군 군민위원회는 평택우시장(현재 평택초등학교)에서 신탁지지 군민총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반탁운동의 기세를 꺾으려던 좌익세력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과시하려고 군중을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각 읍·면의 군민들에게 고무신과 광목을 나누어 주고 반강제로 군중들을 동원했다. 군중들은 머리에 수건을 매고 찬탁지지라는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찬탁지지 궐기대회 정보를 접한 우익세력들은 대회를 분쇄할 계획을 준비했다. 그런데 미 군정 평택책임자인 파악스 상사가 국제사회주의자이고 평택경찰서의 사법주임인 최문진이 좌익세력의 동조자였기 때문에 좌익세력 대회 분쇄계획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여기에 우익진영의 행동세력은 100여 명 정도였으나 좌익세력은 만여 명에 이르렀다.
우익 청년별동대가 군중을 위장해 대회장에 잠입한 후 여러 곳에 배치됐다. 좌익의 찬탁지지 궐기대회는 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의 사회로 시작돼 인민위원장이 궐기사를 하자 군중들은 “옳소”, “옳소” 했다. 찬탁지지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우익 청년별동대는 돌팔매질로 장내의 혼란을 유도한 뒤 몽둥이를 휘둘렀다. 군중들은 무너지고 대회는 아수라장이 돼 막을 내리게 됐다.



송탄면 가재리 사건


1946년 9월 하순경 좌익진영인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가 총파업 지령을 내리자 파상적으로 전개되던 농민폭동사건이 전국적으로 파급됐다. 이 시기 평택군 송탄면 가재리에서 시작한 농민폭동사건이 칠원·도일리로 파급됐다. 주모자인 좌익진영 극력분자 김현욱은 마을 사람들을 선동해 반정부 난동을 일으키고 사회를 불안하게 했다. 김현욱은 이장과 부락의 온건한 유지들을 상대로 성토를 하고 난동을 부렸다.
우익진영의 청년단체는 약 50여 명의 대원(이중에는 여성단체 회원들도 있었음)을 밤중에 파견해 사건현장에 잠입하려고 했다. 이에 가재리에 있던 난동패들이 투석전으로 대항하며 고춧가루 세례에 밀려 처음에는 고전했으나 결국에는 진압했다. 당시 주모자였던 김 현욱은 서울농전을 중퇴하고 칠원과 막곡에서 좌익활동을 했으며 인민군 점령시에는 평택 군수로 활동했다.



팽성면 계양리 꽃동산 사건


송탄면 가재리에서 농민폭동사건이 일어나자 고덕면과 팽성면 계양리 꽃동산에서도 일 어났다. 주모자는 팽성면 서부 일대 농민들을 계양리 꽃동산으로 집합시켜 반정부 선동과 횃불시위, 우익진영 인사들에 대한 성토를 했다. 우익진영의 청년단체가 바로 출동해 진압 했다.



평택 됫박산 사건


평택군 여러 곳에서 농민폭동사건이 계속되면서 됫박산(현 합정동) 근처에서 좌익세력이 주도한 농민폭동사건이 일어났다. 주모자는 한국전쟁 시 군인민위원장과 인민학교장을 지 낸 사람으로 농민들을 됫박산으로 모이게 하고 우익타도를 외치며 난동을 부리면서 시내 로 들어가 시위했다. 우익진영의 청년단체 100여 명이 출동해 도로를 차단하고 농민폭동 을 진압했다.



수원극장 사건


1946년 5월 중순경 경기지구 민전대회가 수원시 수원극장에서 개최 예정되자 우익진영, 청년단체들은 이 대회를 분쇄하기로 했다. 각 군 청년단체에 출동을 요청했고 평택군에서 는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이 각 읍·면에 연락해 50여 명의 별동대원을 출동시켰다.
각지에서 수원극장에 도착한 우익진영 청년단체 단원들은 극장내부에 잠입하고 극장 밖 을 포위해 좌익진영 거물인 이강국을 납치하려고 했다. 좌익진영 청년들과 경찰관들이 삼 엄하게 경비하는 가운데 1천여 명이 모인 민전대회가 개최됐다.
대회 중 이강국이 연설을 하고 있을 때 우익진영 청년들이 단상을 점령하고 약 300여 명 의 청년들이 안팎으로 돌진했다. 민전대회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이강국은 도피했다.



진위면 봉남리 무봉산 사건


1948년 남한만의 단일정부수립이 기정사실화되고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일이 다가오자 좌익진영 세력들은 군중을 선동하고 사회불안을 조성하려고 전국에서 폭동사건을 일으켰다.
1947년 3월 중순경 진위면 봉남리 동북방 무봉산에서 좌익진영 주모자들이 주변 농민들과 인근 용인지방 주민 수백명을 모아놓고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봉화시위를 전개했다. 양재현을 중심으로 한 우익 청년단체가 각 읍·면에 있는 별동대를 동원해 평택경찰서와 합동해서 무봉산 농민폭동사건을 진압했다.



농민폭동이 일어났던 진위면 봉남리 무봉산 전경

| 농민폭동이 일어났던 진위면 봉남리 무봉산 전경 |


경기지구 민전간부회의 사건


1948년 5·10 선거일을 앞두고 평택에서 경기지구 민전간부회의가 예정돼 있었다. 우익진영의 청년단체 별동대는 회의장을 급습할 계획을 세웠다. 평택 구시가지 2층 건물에서 경기지구 민전간부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약 50여 명의 우익별동대가 회의장을 급습해 좌익진영 경비대와 충돌했다.
좌·우익 간에 고함과 몽둥이로 싸우다가 참패한 좌익진영 세력들은 가마니로 만든 들것에 부상자를 싣고 적기가를 외치며 시가를 누볐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의 중립노선으로 인해 우익진영 청년단체 별동대원들은 회의진행 방해라는 죄목으로 검거됐다.



서탄면 수월암리 사건


1944년 7월 10일, 서탄면 수월암리에서 농민폭동사건이 일어났다. 군청 직원과 서탄면 직원인 한현수·이종진 외 4명은 하곡공출 독려차 마을에 나왔다가 이장 최창선 집에 들렀다. 서탄면 수월암리에는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있어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농악을 울리면서 들일을 하고 마을로 돌아오다가 이장집에서 나오는 공무원들을 만나게 됐다.
농민들은 농기를 앞세우고 공무원들의 길을 막았다. 그리고 공무원들을 잡아치우자며 달려들어 구타해 납치했다. 평택경찰서는 경찰관을 출동시켜 난동을 제지하려고 했다. 이에 서탄면 수월암리 주민들이 오산면(현 오산시) 두곡의 주민들까지 선동해 삽·낫·몽둥이를 휘두르며 저항했다.
농민들은 천여 명에 이르렀고 경찰관은 10여 명에 불과해 오히려 윤부섭·최일용 경관이 납치됐다. 평택경찰서는 수원경찰서와 합세해 진압했다. 여기에 서탄면과 진위면 우익진영 청년대와 각 면에서 출동한 대원들이 합세해 서탄면 수월암리의 농민폭동이 진압됐다.



성환역 철도 개통 사건


1946년 9월 좌익진영인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는 산하의 각 산업체에 파업을 선동했 다. 용산과 영등포 등지에서 철도노조 파업이 일어나 국가 운송망이 흔들리게 됐다. 당시 미 군정하에서 경찰력만으로 노조의 파업과 폭동을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에 우익진영 청년단체와 학생들이 총단결해 철도노조의 파업과 폭동을 진압했다.
철도노조의 파업이 진압되면서 경부선이 다시 개통됐고 시운전이 시작됐다. 우익진영의 중앙 청년단체 지휘본부는 각 지역 역구간을 호송하라고 했다. 당시 평택에서는 씨름대회 가 열리고 있었는데 대회를 중단하고 모두가 이 행사에 참여했다.
100여 명의 청년단체 단원들이 기관차에 올라 성환역에 진입해 성환지구 광복청년회 회 원들에게 인계하고 평택으로 귀환할 때 성환경찰지서장과 시비가 일어났다. 성환지서장은 불법시위라며 강경했고 청년들은 평택까지 추적해 온 성환경찰서 지서장에게 체포됐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건국 청년운동사』, 건국청년운동협의회, 1989.

『평택군지』, 평택군지 편찬위원회 1984.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