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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 및 주변지역의 전투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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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죽미령 전투


오산 죽미령 전투 개황도

| 오산 죽미령 전투 개황도 |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1일 미 제24사단 선발대가 부산공항에 착륙해 7월 3일 부산에 기지사령부를 설치하고 연이어 상륙하는 미군주력부대를 지원했다.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스미스(Smith) 특수임무부대는 한국에 최초로 공수된 미 제21연대 일부 병력으 로 7월 4일 오전 4시 50분 오산 북방죽미령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스미스 부대는 미 제 21연대 1대대가 중심이 된 부대로 2개 소총중대와 75mm 무반동총 소대 4정, 박격포 소대 4문 등 406명으로 구성됐으며 미 제52포병대대 A포대 105mm 6문의 지원을 받았다. 스 미스 부대는 죽미령 부근 경부국도와 철도주변 100m 내외 능선에 배치됐으나 전투준비는 매우 미비한 상태였다. 지원 포대 역시 1200발 포탄 중 대전차포탄은 6발뿐이었고 기타 장비 역시 매우 부족했다. 이들의 후방인 오산에는 제17연대가 있었으나 호주 공군의 오폭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수원을 점령한 북한군 제4사단은 제107전차연대를 선두로 1950년 7월 5일 오전 7시 30분 스미스 부대를 공격했다. 오전 8시 16분 최초의 미군포화가 북한군 전차를 향해 발사됐다. 75mm 무반동총과 2.36로켓포가 발사됐으나 북한군 전차는 남진을 계속했다. 보병진지를 돌파하고 죽미령 고개를 넘어오는 북한군 전차 중 2대를 포병의 직접 조준 사격으로 격파했으나 전차는 미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남쪽으로 계속 내려갔다. 오전 11시경 북한군 제4사단 제16, 제18연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스미스부대는 박격포 사격으로 전차를 사격했으나 이에 아랑곳없이 북한군 전차는 아군에게 직접 조준 사격을 했으며 보병들은 스미스 부대 양 측면을 우회해 포위하기 시작했다. 무전기 고장으로 통신이 두절돼 포병지원을 받지 못한 스미스부대는 결국 압축해오는 포위망을 뚫고 오산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오산도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던 터라 안성으로 철수했으며 오산을 지키던 국군 제17연대도 조치원으로 후퇴했다. 스미스부대는 안성에서 새로 도착한 미 제34연대 3대대와 합류해 천안에 도착했다. 이 작전으로 스미스 부대는 전사 150여 명, 실종 26명의 손실을 입어 사실상 전투 임무수행이 불가능했다. 단순한 정찰 행동으로 북한군을 저지시킬 수 있으리라는 안일한 전술판단이 사라지자 미군의 정규사단이 연이어 참전하게 됐다.



평택-안성지구 전투


북한군 탱크를 공격하는 미군(서정리 인근, 1950.7)

| 북한군 탱크를 공격하는 미군(서정리 인근, 1950.7) |



오산 죽미령에서 스미스부대가 패한 뒤 윌리암 F. 딘 소장이 이끄는 미 제24사단 주력이 투입돼 경부국도 상에서 치열한 교전 을 벌였다. 사단장 윌리암 F.딘(Dean) 소장은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를 오산 에 투입할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군의 전력을 대수롭지 않을 것으로 오판했 다. 그는 오산 북쪽에서 북한군을 저지 해 시간을 얻게 된다면 제34연대를 안 성·평택 선에 전개해 적의 남진을 충 분히 막으리라고 판단했다. 때문에 선 발대가 대전에 도착하자 사단장은 이 대대가 스미스 부대 철수에 따른 엄호와 수용 임무를 아울러 맡도록 응급조치했다. 7월 5 일 새벽 제3대대와 연대본부가 도착하자 동 연대장 제이 B 러브리스(Loviess)대령에게 연 대 지휘소를 성환에 두고 평택과 안성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지시했다.
사단장이 평택과 안성 선에 방어선을 펴기로 한 것은 평택이 금강 이북지역에서 국도 방 어에 가장 유리한 지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서쪽은 아산만에 연하는 안성천이 자 연적으로 평택의 서쪽 측방을 방어하는 형세고 동쪽인 안성과의 사이에는 남북 종단도로 가 빈약해 적의 공격 측은 오산과 평택 국도라고 내다 본 것이다. 따라서 평택-안성 선을 잃게 되면 금강 이북지역에서는 적과의 결전을 위한 본 방어선을 편성하기 어렵다고 판단 했다. 연대장 러브리스 대령은 제1대대 지휘소를 평택 북쪽 외곽에 있는 민가에 개설하고 C중대를 예비로 확보해 A·B 양대 중대로 경부국도 방어에 임하게 됐다.
7월 5일 북한군 제4사단은 전차부대를 선두로 서정리까지 진출했고 비와 안개 속에 부 대기동을 은폐하며 평택 공격을 계속했다. 이날은 미 지상군 교전 제1일 차이자 제34연대 가 참전한 첫 번째 날이기도 했다.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가 죽미령 고개에서 혈전을 벌인 것과 달리 이번에는 큰 접전 없이 평택-안성 선을 유지했다. 1대대는 신임 대대장 헤럴드 B. 에이리스(Ayres) 중령 지휘 하에 평택에 진출했다. 사단 포병사령관 대리인 조지 바스 (Geroge B. Barth)준장도 오산에서 평택에 도착했다. 바스 준장은 스미스부대 교전상황 을 에이리스 중령에 전하며 곧 적의 전차가 들이닥칠 것이니 전방을 정찰해 경비토록 하고 로켓포 조를 배치해 전차에 대비토록 했다.
북한군은 종대 대형으로 접근한 후 축차적으로 보병을 산개하며 보, 전 협동으로 아군 을 정면 압박했다. 좌우양익으로 기동해 아군의 측방을 강타하고 후방 정찰대를 침투시켜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아군의 통신선을 절단해 부대지휘를 불가능하게 하는 등 조직적 인 작전 수행을 못하게 했다. 민간인 복장을 한 게릴라 대원은 피난민 사이에 끼어들어 후방을 교란하며 공포와 혼란을 야기 시켜 공격성과를 증대시켰다. 미 제34연대는 오전 9시 지휘소를 성환으로 이전하고 지원 중인 공군의 폭파 조에게 일선중대가 집결하는 즉시 평택 북쪽에 있는 통복천 교량을 폭파토록 했다. 그러나 평택은 7월 6일 북한군 치하에 들어갔다.
7월 10일 짙은 안개 속에서 천안으로 진격하던 북한군 기갑부대는 오후 미 공군 F-80전투기들의 공격을 받았다. 전차를 따라 트럭들이 일렬로 줄지어 평택을 지날 무렵 하늘을 낮게 날아온 미 제5공군 전폭기가 전차 40대와 인민군차량 117대를 파괴하고 상당한 병력을 전사시켰다. 한국전쟁 당시 공군전투 중에서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전투였다.



아군에 의한 오인 평택폭격사건


UN군에 의한 오폭으로 폐허가 된 평택역(1950.7.4)

| UN군에 의한 오폭으로 폐허가 된 평택역(1950.7.4) |



1950년 7월 4일 평택 상공에 유엔군 폭격기로 보이는 군용기가 나타났다. 주민들은 우군 비행기가 평택상공을 선회하자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느닷없이 평택 성동초등학교 쪽에 기관총을 사격하기 시작했다. 이어 시내 간선도로와 군수물자가 산적해 있는 평택역에도 집중 폭격을 시작했다. 이 폭격은 폭탄을 산적한 차량에 명중됐으며 파편들이 1㎞ 반경을 강타함으로써 건물들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죽었다. 수원 신병훈련소에 입대했다가 후송 중이던 장병들도 평택역에 정차했다가 사망했다. 당시 죽은 시체는 101구였으며 역 구내에 가매장했다가 수복 후 합정1리 공동묘지에 이장됐다. 이후 101용사 묘역을 만들어 매년 평택군과 사회단체가 합동위령제를 지냈고 현재는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평택에서 1군단 창설


육군 1군단 창설기념 표석(평택 성동초등학교 내)

| 육군 1군단 창설기념 표석(평택 성동초등학교 내) |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 당하자 7월 4일 육군본부 전방지휘소가 오산에서 평택으로 이전해 평택군청 건물에 전방 지휘소를 설치했다. 육군본부는 계속 적군에 밀리 자 수원방어를 포기하고 제1군단 산하 수도사단 제1사단과 2사단을 평택으로 집결시켰다.
7월 5일 평택에서 육군1군단을 창설했는데 혼성 6개 사단을 3개 사단으로 재편했다. 총 병력은 2만 5천명이었으며 초대지휘관은 김홍일 소장이 임명됐다.



이지중대와 총검의 고지 전투(Battle of Bayonet Hill)


총검의 고지 전투 추모기념식(2014.2)

| 총검의 고지 전투 추모기념식(2014.2) |



밀렛대위 조형물

| 밀렛대위 조형물 |



1951년 2월 7일 송탄 180고지에서 미 육군 25사단 27연대 E중대 1소대가 200여 명의 중공군에게 포위됐다. 이 지중대(easy company)로 불렸던 E중 대는 적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그러 나 탄약이 떨어진데다 대전차용 중화 기마저 공격당하자 중대장 루이스 밀 렛 대위는 병사들에게 소총에 착검을 하라고 지시하고 대전차포를 발사하는 적을 향해 중대원들의 돌격을 명령했 다. 병사들은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적진으로 달려들 어 총검을 휘두르며 적을 사살하기 시작했고 결국 혼 란에 빠진 중공군은 도주했다.
이 전투로 인해 밀렛 대위는 적의 수류탄 파편에 맞 아 부상했으나 고지를 완전히 사수할 때까지 병원으 로 후송되기를 거부하며 중대를 계속 지휘하는 투혼 을 발휘했다. 이지중대는 총검으로 47명의 적을 사살 했으며 61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치명적인 타격으로 고지를 사수했다. 5개월 후인 7월 5일 영웅적인 리더 십을 발휘한 밀렛 대위는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최 고영예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1952년 이곳에 미 공군 오산에어베이스가 자리 잡았 다. 치열한 격전을 벌인 그곳을 미군들은 ‘총검의 고 지(bayonet hill)’라 하고 밀렛 대위의 투혼을 기리기 위해 기지 안 총검의 고지가 있는 주변도로를 ‘밀렛 로드’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현재 이곳에는 미7공군 사령부 및 한국 공군작전사령부 등 한·미 공군 주력부대가 주둔해 있다.



평택 청년방위대와 국민방위군


대한청년단을 근간으로 조직된 청년방위는 ‘청방대’라고도 부르며 현재의 향토방위대 같은 임무를 띠고 있었다. 정부수립 직후에는 예비군이나 향토방위대가 없어 정부가 국가 유사시 향토방위 몫을 할 수 있도록 대한청년단원 가운데 반공사상이 투철한 사람을 청년방위대에 자원 입대시켰다. 청방대는 군대편제 식으로 조직됐으며 군사훈련을 하고 국가관을 심어주었다. 6·25한국전쟁 당시 우리 국군의 병력장비는 허약했고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청년방위대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북한군이 점령할 당시 미처 남하하지 못한 청방대원과 국군 낙오병 약 30여명은 서탄면 황구지 으슥한 곳을 근거지로 삼아 지하활동을 벌였다. 이곳은 오산천과 진위천, 황구지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교통이 별로 없는 후미진 곳이었다. 9월 19일 청방대원과 국군 낙오병들은 유엔군이 수원까지 진격했다는 정보에 고무돼 철수하지 못한 인민군을 습격하고 내무서에 구금돼 있는 반공유지들을 구해낼 준비에 들어갔다. 대한청년단 서탄면 단부 감찰 부장을 맡고 있던 황구지 출신 라용향羅俑鄕은 숨어있던 동지와 낙오병들을 규합해 갖고 있던 소총과 무기로 밤에 서탄면 인민위원회와 내무서를 습격했다. 인민군들은 급습을 받게 되자 후퇴하려던 인민군까지 돌아와 반격했으며 회화리 하천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적의 숫자나 무기로 보아 청방대원 측은 열세였다. 생존자가 고작 10여명에 불과할 정도로 많은 희생자를 낸 청방대원은 화성군 정남면 쪽으로 후퇴했다. 전투에 직접 참여한 청방대원은 라용향을 비롯해 황화근·강정환·임흥묵·백음철·이용남·이은복 등이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열세에 놓이자 1950년 12월 21일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 령을 공포하고 기존의 청년방위대와 전 호국군장교護國軍將校, 예비역장교들을 국민방위군 편제에 들게 했다. 국민병동원령을 내리고 국민방위군으로 하여금 경상남북도 일대에 국민병을 수용할 교육대를 설치해 운영토록 했다. 이들에게 정부에서 지급되는 것은 1일 식량 4흡과 부식비 20환이었다. 전국적으로 2백만 명이 동원된 제2국민병은 정부의 무분별한 병력증강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국민병 수용대책이나 보급, 훈련 대책도 없이 진행됐다. 이후 중부전선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며 휴전이 거론되자 1951년 3월 26일 해체됐다.
평택군에서는 1950년 12월 27일 평택 성동초등학교 교정에서 만 18세부터 50세까지의 장정 약 1만 2,000명과 안성군 지역 장정 등 약 2만여 명에 이르는 제1 국민병을 모집해교육대가 있는 남쪽으로 행군했다. 방위군 제4지대장 차관영의 지휘로 겨울 혹한에 피복 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국민병들은 안성·장호원·문경 등을 거쳐 1월 11일 삼량진에 도 착했다. 일부는 삼량진교육대에 수용됐으며 나머지는 창녕·마산·부산 등지로 분산 수용 됐다.
평택군 국민병 대장이었던 차관영은 당시 국민병교육대 위치를 만들기 위해 부산에 내려 가 수일을 두고 물색해 시장에 간신히 작은 공간을 얻었으며 부산 동래釜山東萊지역에 막 사를 만들어 평택군 장정 3천여 명을 수용했다. 평택군 국민병교육대는 대장 차관영, 행정 처장 김진옥, 작전처장 김장묵, 정보처장 이경덕, 군수처 보좌관 전석홍, 제1대대장 김필, 제2대대장 이철훈, 제3대대장 이명호, 제4대대장 이호용, 제5대대장 이재옥, 의무대장 최 준화, 시설관 최병규·김완기·송준환·정훈관·정시우·유호종·한상복·구매관·이상 훈, 경리장교 이해근, 기간장교 홍순완·김정현·차종성·차상봉·안성만·최병철·서정 운 등 50명이었으며 이들은 전쟁 전 반공청년운동의 지도층이었다.
이들은 9·28 수복 때 획득한 폐기차량 2대를 수선해 땔감 장사를 해서 부식비와 의료비 를 충당했다. 초대 청년연맹위원장과 평택군 사회계장을 역임했던 최준화는 후퇴 시 군에 서 보유했던 다량의 의약품을 소지하고 있어 구급환자 돌봄에 도움을 주었다. 교육대는 부 산에서 평택군 피난민들의 보호소 역할도 해 난민수용소와 흡사하게 운영됐다. 이후 국민 병 해산 지시에 의해 1951년 4월초 평택으로 귀환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 평택군 복구사업 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북한군 점령 당시 평택 상황


1950년 7월 5일 평택이 격전지가 되자 평택 군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후방 신병모집 교육을 위해 청년방위대가 평택을 철수하면서 각 기관을 비롯해 일반주민들도 피신할 곳을 찾아 피난길을 재촉했다. 평택경찰서는 좌익분자 처리와 치안유지를 위해 최 후까지 있다가 맨 뒤에 철수했다. 평택이 완전히 북한군 치하에 들어가게 된 것은 7월 10 일 부터다. 지방의 좌익세력들은 때를 만난 듯 날뛰었고 즉각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각급 조직을 만들어 인민군과 함께 보복 수단을 취했다. 평택세무서 구청사 자리에 내무서內務 暑를 설치하고 각 읍면에도 분주소를 두었으며 군과 읍면에는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국 민학교는 인민학교로 변했다. 북한군 치하가 되자 좌익분자들은 험악해졌고 이에 동조하 는 세력과 앞잡이들이 앞 다퉈 날뛰었다.
공산당은 16세 이상 청소년들을 의용군이란 명목으로 강제 입대시켰고 일반 민중은 사상 훈련과 전쟁복구 작업 등에 동원돼 혹사당했으며 식량은 배급제로 간신히 기아를 이겨냈다. 좌익분자들은 미처 후퇴하지 못한 반공인사나 유지급 인사들, 공무원들을 회유하기 위해 온갖 협박과 공갈뿐 아니라 총이나 칼로 위협했다. 부락인민위원장을 세울 때는 무식하거나 성격이 거친 머슴들을 뽑았다. 부락민들은 그들의 등살에 배겨낼 수 없어 하기 싫어도 인민위원장 자리를 맡는 경우가 있었는데 전쟁 후 선량한 사람도 부역자로 간주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농민에게는 토지를 분배해 준다는 감언이설로 선동했고 농지를 소유한 자에게는 소위 지주계급이라는 딱지를 붙여 매도했다. 머슴 살던 사람들을 골라 인민위원회 간부자리를 주어 중농 이상의 자들에게 재산을 압수했다. 추수 때는 현물세라는 명목으로 잡곡에서부터 과실나무까지 수확량을 낱알까지 세어 징수해 갔다.
열성당원으로 활약하며 군민을 괴롭혔던 자들이 많았는데 그중 한 명이 평택군 인민위원장 겸 성동인민학교 교장을 지낸 자였다. 그는 합정2리에 거주했던 자로 서울 중앙고보를 나왔으며 그의 아버지는 철도선 공부工夫였다. 공산당 앞잡이로 나서고 패전과 함께 월북했다.
인민군들은 처음에는 군기를 엄하게 하며 질서를 강조했고 무산계급의 해방 전사라고 지칭하며 인도적, 또는 도덕을 표방했으나 날이 갈수록 점점 마각을 드러냈다. 내무서 내에는 정치보위부가 있어 민족주의 반공지사들을 색출하는데 주력했다. 우익인사들이나 노동자 가족들까지 인민재판이라는 형식으로 판결을 내렸으며 군중이 보는 앞에서 탄환이 아깝다고 몽둥이로 죽이거나 총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전란 중 피란을 가지 못한 반공인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숨어야 했으며 이곳저곳에 은신하고 있던 국군 낙오병들을 보호하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밤에 무선으로 전황을 파악해 뜻이 통하는 주민들에게 연락함으로써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들은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그들의 초소를 야간에 습격하기도 했으나 삼엄한 추적과 숨어사는 굶주림 등으로 끝내는 체포돼 고문에 시달리고 학살당했다. 어떤 이는 웅덩이에 투신자살하기도 하고 또는 납북되기도 했다. 체포됐다가 살아남은 반공지사들은 100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패주할 때 인민군에 끌려가다가 송탄 도일리, 칠원리에서 무더기로 난사 당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진위면 하북리 이용찬, 갈곶리 이흥균李興均, 송탄 장단리 김계선金桂仙 등의 증언에 의하면 지역을 위해서나 조국을 위해 싸운 이들은 대부분 8·15 해방 직후부터 반탁운동을 위시해 좌파세력을 타도하는데 앞장서 전국운동에 일익을 담당했던 우익단체 간부이거나 대공 투쟁에 혁혁한 공이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피난길 참상


북진하는 연합군

| 북진하는 연합군 |



서울이 적에게 빼앗기게 되자 전황은 아군에게 극도로 불리하게 됐다. 물밀듯이 공격해 내려오는 적의 기세에 밀려 후퇴하는 국군을 보면서 피난 사태가 줄을 이었 다. 좌파세력들의 보복 대상이 되는 반 공지사들은 피신할 곳을 찾아 방황했 으며 그밖에 다른 사람도 친척, 친지를 찾거나 무턱대고 피난길에 올랐다. 피 난민은 아군이 후퇴할 때 금강방어선 을 주축으로 적을 물리치면 다시 고향 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아산을 거쳐 공주읍으로 이동했 다. 당시 국도는 작전상으로만 통행이 허용됐기 때문에 지방도를 우회하는 실정이었다. 후 퇴도중 백석포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아산만 해안상공에 적 비행기가 공습을 해오기 시작 했다.
평택에서 먼저 후퇴한 것은 상부지시의 임무를 띤 청년방위대 4지대 장병 약 150명과 각 종 반공애국단체 간부 약 100여 명이었다. 청방대원들의 무기라고는 몇 자루의 소총이 전 부였기에 적이 금강을 진격해 오자 청방대원들은 공주에서 논산으로 후퇴했다. 논산에는 박승훈 대령이 이끄는 정비 사령부가 있었으며 예비역 장교 수십 명의 차출을 요구받아 현 지 입대하고 신병양성을 위해 충청북도 영동에 교육대를 설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금산 군 지방에서 장병 1천여 명을 모집해 8월 중순 경 무주를 거쳐 영동으로 장정을 인솔했다.
대원들보다 앞서가던 수도기동경찰대원 약 50여 명이 구천동 고개에서 공비 빨치산 부대 의 습격을 받아 전멸했다. 그러나 우리대원들은 200여 명이 치열한 접전을 벌여 퇴각시켰 다. 그러나 빨치산 부대와 교전하는 바람에 금산 땅에서 모집한 장정들이 흩어져 모두 도 망치고 말았다.
우리대원들은 신병교육대 인적자원을 잃은 채 압박해오는 적에 밀려 영동에서 체류할 겨 를도 없이 김천, 대구를 경유해 경북경산에 이르렀다. 상부지령에 따라 신병 P교육대 편성 에 들어갔고 모병교육에 분전했다. 최종 철수한 평택경찰서는 성수환 서장의 인솔 하에 김 천에 본거지를 두고 대구 팔공산 지구에서 전투 활동에 임했다. 평택군청 직원을 비롯한 각급 공무원들은 대구, 부산 등지에 산발적으로 모여 피난하는가 하면 개인적으로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반사회단체 지도자 및 간부들도 대구 등지에 산재해 있었다. 경산 소재 신병교육대는 평택출신들이 주축을 이뤘기 때문에 남하한 유지인사나 그 외 많은 인 파가 이곳을 끊임없이 거쳐 갔고 머무는 피난민도 많았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아군은 각 전선에서 북진을 계속했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고 10월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함에 따라 10월 1일부터 피난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피난길에 죽은 사람, 납치된 사람, 본의 아니게 부역자로 유치장에 있는 사람이 많았으나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다시 생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10월 2일경 평택경찰서가 제일 먼저 들어오고 이후 평택군청, 학교 및 공공기관, 사회단체가 속속 돌아와 복구 작업에 임했다. 이 때 평택의 모든 기관 청사는 소실 됐으며 유일하게 세무서 청사만이 남아 있었다. 평택경찰서는 구 시가지 평택병원에 임시 청사를 두고 이상덕 사찰 주임의 지휘를 받아 부역자들을 색출해 현재의 평택단위조합 농협창고와 구 세무서 건물에 구속 수감 했는데 그 수가 약 500여 명에 달했다. 그중에는 각계 인사들이 포함돼 있으나 대체로 강제부역자들이기 때문에 정상참작에 따라 전부 훈방조치 됐다.
아군과 연합군이 북진을 계속하는 동안 평택지역 주민들은 평온을 되찾아 복구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중공군 참전으로 인해 전세가 다시 역전돼 사람들은 피난길에 올랐으나 중공군은 남진하면서 진위면 신리에서 영국군을 만나 격퇴 당했다. 평택지역은 평택경찰서가 최후까지 치안을 유지하다가 1951년 1월 초순경 김인환 서장의 인솔로 대전으로 이동해 주재했다. 그해 2월 중순경 평택에서 북한군이 물러난 후 평택 경찰은 다시 돌아와 치안을 담당했고 평택군청은 대구에 분산해 있다가 돌아와 행정을 시작했다. 1·4후퇴 때 남하한 피난민이 평택과 오성지역에만 무려 13만 명이 집결돼 있었다. 벌판은 폐허로 변했고 길은 황량했다. 6·25때 남아있던 집들도 피난민과 군인들이 추위에 불을 피우기 위해 부수어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평택의 피해상황


한국전쟁으로 인한 인적·물적 피해는 막대했다. 특히 두 번씩이나 남과 북으로 밀리고 전진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평택지역은 거의 초토화 되다시피 했다. 1951년 9월 1일 경기도에서 조사한 피해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평택지역 인명피해는 모두 631명으로 사망 304명, 납북 150명, 행방불명 22명, 부상이 155명이었다. 일반주택은 전 호수 1만 6142호 중 전파 1,354호(8.3%), 반파 686호(4.2%)로 피해호수는 12.5%에 이르렀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5,229,750환 이었다. 청사피해는 전파 238평, 읍면청사 피해는 전소 1개소, 반소 5개소로 연건평 942평의 피해를 입었다.
중학교는 1개소 306평이 전소됐고 초등학교는 14개 학교에 전소 1,636평, 반소 3,771평 등 총 5,407평이며 금액으로 환산하면 4,324,118,000환이다. 세무서는 65평이 반파됐다. 운수사업소 관련 건물은 전파가 105평이며 농회창고는 모두 18개소에 전파 6개소, 반파 4개소였다. 종교단체는 전파 1개소에 40평의 피해를 입었다. 도정공장은 전소 2개소, 반소4개소의 피해를 입었으며 어선은 범선 3척이 피해를 입었다. 일반 업체는 전파 9개소, 반 파 16개소에 연면적 1,338평의 피해를 입었다.



피난민 구호 및 정착사업


평택지역은 전란으로 인해 두 번에 걸쳐 피난민들이 집결하거나 머물렀던 곳이다. 중공 군 개입으로 1·4후퇴 당시 피난민이 대대적으로 유입돼 피해가 컸다. 전세가 회복되면서 남하했던 피난민이 고향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평택 북부지역이 군사 작전상 저지되었 다. 평택 오성 지역에 13만 명, 평택 남쪽 둔포 지역에 10여만 명 등 약 30만 명이 일시에 집결돼 구호에 문제가 됐다. 정부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가로부터 구호물자를 받아 그들을 구호했으며 경기도에서도 구호반을 편성해 평택에 파견 주재했고 급식소를 설치해 매일 3식을 제공했다. 피난민 천막수용 시설은 96개소로 2,400명을 수용했다. 피난민들 은 고향이 수복되는 대로 귀향해 95%가 떠났고 수복이 되지 않은 이북지역은 그대로 남아 정부 지원에 의해 정착하거나 구호에 의지하며 생활했다.
경기도가 집계해 발표한 1951년~1955년까지 4개년 간의 구호 상황은 다음과 같다.


[평택군 전쟁 구호현황]

(단위 : 세대, 명)

구분 합계 원주민 구호 전재민구호 피난민 구호
연도 세대 인원 세대 인원 세대 인원 세대 인원
1951 16,479 85,825 6,862 36,902 2,073 11,947 7,544 36,979
1952 16,608 86,873 6,326 33,570 2,748 14,522 7,534 38,781
1953 15,847 87,147 6,144 34,617 2,199 11,687 7,504 40,843
1954 13,579 67,757 6,808 34,034 1,423 6,970 5,350 26,753
1955 13,347 66,597 6,590 32,954 1,421 6,960 5,336 26,683

[평택군 인구통계]

(단위 : 세대, 명)

연도 가구수 가구당 평균인구
1956 16,479 120,021 58,838 61,188 5.9

1955년을 기준으로 구호 가구는 전체가구의 80%였다. 원주민 구호가구는 6,590가구로 전체 가구의 39%였고 전재민 구호는 1,421가구로 8.5%, 피난민 구호는 5,336가구로 31.7%가 구호에 의존해 생계를 이어갔다.
전쟁 중에 수많은 고아도 발생했다. 천주교와 성공회, 기독교, 교회 독지가 등이 수용시설을 만들어 평택시 내 6개소에서 약 500여 명의 고아들을 수용해 보살폈다.



[후생시설]]


시설명 대표자 소재지 수용인원 사업종별 인가사항 소유별 종교별
천혜보육원 이귀임 평택·비전 94 육아 인가 -
성신보육원 신린표 평택·비전 58 육아 인가 천주교
안중 아동보소호 박병무 오성·안중 105 육아 미인가 성공회
에덴 아동보호소 김오봉 평택·객사 26 육아 미인가 기독교
성육 아동보호소 김계선 송탄·지산 87 육아 미인가 -
애향 아동보호소 유연흥 송탄·서정 51 육아 미인가 - -

휴전 후 서울이 완전히 복구되자 평택의 난민수도 감소했으나 미 수복 난민(개성·개풍·장단·옹진·연백) 등이 문제가 됐다. 정부는 소비적 임시 구호책을 가급적 피하고 항구적인 정착구호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원 거주지에 복귀할 가능이 없는 난민을 위해 도내 미개간 유휴지와 간석지를 최대한 개발·이용함으로써 이들이 항구적인 생활토대를 확립할 수 있도록 했다. 평택군에서도 관내 간석지 및 하천부지, 황무지 등에 허가를 받아 귀향이 불가능한 피난농민에게 정착사업장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난민정착을 위해 정부에서는 총 1,881세대 1만 1,330명에게 1,787.7ha의 하천 부지와 간석지 등을 개간하도록 해 구호 사업에 경주했다.


[난민정착사업일람표]

(단위 : 세대/명/ha)

승인
연월일
정착호수 정착사업구분 개간
예정
지목
정착 사업장
소재지
난민
출신지
대표자
성명
구호폐지
연월일
세대 인구
(명)
지목 면적(ha)
1952.
7. 2
83 569 하천부지 80 평택군 팽성면
마두리
장단 권문식 1954.
7. 31
1952.
9. 18
93 629 황무지 100 평택군 추팔리 장단 이홍기 1954.
9. 30
1954.
4. 11
220 1,447 하천부지 220 고덕 동고리 북한 당승업  
1954.
5. 13
150 915 하천부지 150 팽성 신대리 북한 당승업  
1954.
10. 11
200 1,060 황연지 199.7 오성 창내 미수복지 홍순하  
1954.
10. 13
30 200 임야 25 평택읍 비전리 북한 당승업  
1954.
11. 6
70 415 황연지 70 팽성 석봉 장단 이홍기  
1955.
8. 1
140 874 간석지 48.4 염전 포승 원정 북한 김대현  
1955.
8. 10
125 742 귀속농지 125 서탄 마두 연백 김형재  
1955.
8. 23
70 417 하천부지 70 팽택 통복 북한 당승업  
1955.
9. 26
120 608 하천부지 150 팽성 도두 장단 변종식  
1955.
10. 5
380 2,242 간석지 450 청북 고잔172
포승홍원 126지선
연백 차연홍  
1955.
10. 31
100 550 간석지 44.36 염전 청북 고잔
1086번 지선
옹진 강석관  
1955.
10. 31
100 662 간석지 55.24 염전 청북고잔 북한 주용규  
총계 1,881 11,330 총 14건 1,787.7          


현양사업


현충일 기념식(현덕면 권관리, 2013)

| 현충일 기념식(현덕면 권관리, 2013) |



제63회 남아공 한국전쟁 참전 추모기념식(용이동, 2013)

| 제63회 남아공 한국전쟁 참전 추모기념식(용이동, 2013) |



서탄초등학교에 있는 한국전쟁 순국자 위령비

| 서탄초등학교에 있는 한국전쟁 순국자 위령비 |



한국전쟁에 참전해 싸우다 산화한 호국영령과 반공투쟁을 하다 순국한 선열들을 위한 선양사업도 평택지역에서 활발히 진행됐다. 1957년 8월 5일 평택군 유지들은 헌금을 통해 양성 이씨 종산인 비전동 산 116-5번지(덕동산)에 탑신 9.5m 현충탑을 건립했고 1973년과 1977년에는 군비를 들여 비의 상석과 국기게양대, 조경사업 등을 진행했다. 초창기에는 이곳에 육군 소령 고종원 외 791위가 안치됐으나 평택 비전 3리 소재 민간인 반공추념탑으로 24위가 이전됐다. 1981년 송탄읍이 시로 승격돼 현충탑이 새로 건립됨에 따라 139위가 이전돼 현재 이곳에는 628위가 봉안돼 있다.
1975년 9월 29일 국방부에서 용이동 산1-7번지에 남아프리카공화국(공군788명, 육군38명) 한국전쟁 참전기념비를 건립했다.
1978년 4월 28일 한국청년운동 평택군지부는 평택라이온스클럽 회원들의 협조를 받아 비전동 산 77-29번지(매봉산)에 반공청년운동 순국자 57명을 위한 추모비를 건립했다.
1981년 송탄읍이 송탄시로 승격됨에 따라 송탄문화원 주도로 충혼탑 건립사업을 전개하여 서정동 산30-85(등구재)에 1982년 6월 6일 제막했다. 송탄충혼탑에는 평택(덕동산)현충탑에 모신 791위 가운데 송탄출신 영현으로 군·경 전사자 및 민간인 희생자의 영현 139위가 옮겨져 봉안됐다.
1986년 1월 1일 평택읍이 평택시로 분리 승격됨에 따라 평택군은 관리하던 현충탑을 시 에 인계하고 평택군 관내 472기의 영령을 모시기 위해 현덕면 권관리 산109-1(평택호관광 단지 내)에 1987년 12월 26일 현충탑을 건립했다. 현재 평택시 대표 현충시설로 추모 영령 1,113위가 봉안돼 있다.
이 밖에도 서탄면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대공투쟁을 하다 북한군에게 학살당한 주민들을 위안하고자 1952년 3월 서탄면사무소 앞에 위령비를 건립했다. 이곳에 순사자 22위가 봉 안됐으며 1976년 서탄초등학교 교정으로 이전했다.


[평택시 현충 기념물]


이름 위치 목적
평택호 현충탑 현덕면 권관리 산109-26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 추모
무공수훈자 공적비 무공수훈자의 공적을 추모
6.25 참전 공적비 한국전쟁 참전한 이들의 공적을 추모
덕동산 현충탑 비전동 산116-5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 추모
등구재 현충탑 서정동 산30-85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전비 용이동 산1-7 남아프리카 공화국 비행대대 한국전쟁 참전기념
매봉산 반공청년 순국자 추모기념비 비전동 산67-1 한국전쟁 때 반공청년운동 순국자 57명 추모




(이재명_평택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참고문헌]


『평택군지』, 1984.

『송탄시사』, 1994.

『경기도사』, 1954.

동아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대구매일, 부산일보, 문화일보.

『해외자료총서』.

『한국사연표』.

『자료대한민국사』.

『위키백과』.

『유엔군 지원사』, 국방군사연구소, 1998.

『한국전쟁』, 1995.

『한국전쟁사부도』, 육군사관학교 2005.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