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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달수權達洙(1936∼2009)


본관은 안동安東. 비전동 600번지에서 출생했다. 1955년 경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1959년 건국대학교를 졸업했다. 홍진산업사장, 한림전기공업사장을 했고 1983년 한림산업(주)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사회활동으로는 동평택로타리클럽회장, 새마을금고평택군지부장, 안동권씨 평택송탄종친회장을 지냈다. 1988년 민정당 송탄시·평택시지구당 위원장으로 송탄평택지구 제13대 국회의원이 됐다. 국회 내에서는 교통·체신결산위원과 민자당 원내 부총무로 활동했다. 2009년 12월 2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참고문헌 : 『경향신문』, 『동아일보』, 『문화일보』



김영광金永光(1931∼2010)


지산동에서 출생했다. 수원농고 및 고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 후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1960∼1978년까지 중앙정보부에 근무했으며 기획판단국장 및 심리전 총국장을 역임했다. 중정국장 시절인 1975년 추석 때 재일동포 조총련 모국 방문계획을 제안해 성 사시켰고 교민특별 대책위원장을 맡았다. 퇴직 후 제10대 국회 유정회의원으로 정계에 진 출했다.
1981년 제11대 총선에서 한국 국민당 전국구의원으로 입후보 당선됐다. 1992년 제 14대 총선에서는 만자당 소속으로 송탄·평택지역에서 당선된 뒤 민자당 해외동포 특별위원장, 당무위원, 국책자문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국회 내에서 한일의원연맹 운영위원장과 한일 친선협회 부회장을 지내는 등 일본에 정통한 인사 중 한명으로 꼽혔다. 제10대국회의원 시 절부터 안중근의사 유해 찾기를 시작해 30년 가까이 헌신했고 안중근의사 숭모회 부이사 장을 역임했다. 1995년 5월 10일 3개 시군(평택군·송탄시·평택시)이 통합하는데 기여했 다. 2010년 9월 1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례신문』, 『평택시사』



서상린徐相潾(1925∼2009)


안성시 양성면 방축리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중령 때 5·16 군사 쿠데 타에 참여해 외자청 부산사무소장, 강생회 이사장을 지내고 육군준장으로 예편했다. 1963 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용인과 안성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민주 공화당 창당위원장 및 당기위원장을 지냈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시 평택·안성·용인이 한지역구가 되면서 제9대∼10대 국회의원이 됐고 국회 내에서 국회건설 분과위원장, 법사 위원장, 교통체신위원장, 민주공화당 원내 부총무를 역임했다. 특히 국회 내에서 교통체신 위원장 재임 시인 1978년 전화광역화사업의 시범지역을 최초로 평택지역에 유치해 전국 최초의 광역화가 이루어지는데 공헌했다. 2009년 5월 23일 노환으로 미국에서 별세했다. 묘는 대전 국립 현충원에 있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유치송柳致松(1924∼2006)


본관은 전주, 호는 만취晩翠다. 평택에서 출생했다. 1948년 국회의장 신익희 선생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고 1952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56년 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경기도당을 결당해 준비위원 및 평택군당 상무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1960년 국가보안법 개헌 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 중앙당 상무위원 경기도 상무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정치 활동을 금지 당했다. 1963년 5월 창단된 민정당의 청년부장을 맡으며 정치에 복귀했다. 35세 때인 1960년 민중당 평택지구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민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1963년 11월 26일에 치러진 국회의원에 재도전해 당선, 평택지역에서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전통야당의 아성을 구축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의정활동 중 1965년 5월 민정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민중당이 창당되자 원내 부총무에 임명됐으며 1967년 2월 7일 민중당과 신한당 출신 정치인들이 창당한 신민당에 참가해 조직국장과 사무차장을 맡았다. 국회에서 1965년 제20차 UN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1967년과 1971년 국회의원에 입후보 했으나 민주공화당 이윤용과 최영희에게 연이어 패배했다. 1973년 2월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제10대~12대까지 연임하면서 신민당 사무총장과 최고의원, 민한당 총재 등을 지냈다.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제1야당 대통령으로 입후보했으나 2위를 하며 낙선했다. 1985년 11대 국회의원에 당선 5선의원이 됐다.
1988년 치러진 12대 총선에 입후보 했으나 낙선해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후 대한민국 헌정회 12대 회장과 원로회의장 통일원 고문, 신익희선생기념회 회장, 민한동우회 회장, 학교법인 동북학원 이사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역사의 기로에서서』, 『민주화의 과제』,『신익희 선생 일대기』가 있다. 2006년 6월 2일 향년 83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참고문헌 : 『역대국회의원총람』, 『경향신문』, 『동아일보』
<자료제공 및 감수 : 국회의원 유일호(유치송의 자)>



이병직李秉稷(1920∼1995)


본관은 원주原州. 석정리 989번지에서 출생했으며 내기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앙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연세대 의학과를 졸업했으며 1969년 동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1년 수원인제외과의원장을 시작으로 1961년 경기도립 수원병원장을 역임했다. 1969년 수원간호고 교장과 수원간호전문학교장을 거쳐 수원가나호 전문대학장을 했다. 이후 학교법인 수원인제학원을 설립했고 1982년 수원간호 전문대학을 인수 후학양성에 큰 공헌을 했다. 이 대학이 점차 발전해 현재 수원여자대학교 모체가 됐다. 대한적십자 경기지부장과 한양대 의과대 임상교수로 활동했다. 1981년 민주정의당으로 정치에 입문 제11대 국회의원(수원,화성)과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85년 민정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국민포상(대통령), 향토공로상(문화공보부장관), 공로표창(보사부 장관)등을 수상했다. 1995년 3월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묘는 화성시 남양면에 있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경향신문』



이윤용李允鎔(1915∼1985)


본관은 전주金卅. 서정리에서 출생했다. 농과대학인 중앙농민학교 농업 경영학과를 졸업 하고 합명회사 평택운수 사장과 대한통운 외화 주식회사 대표 이사회장을 역임했다. 1952 년부터 송탄면 의회의원에 당선돼(제1대∼3대) 활동했고 도의회 의원을 무소속과 자유 당 소속으로 각각 1대∼3대까지 지냈다. 도의회에서는 예산 결산위원장과 부의장을 했다. 1963년 6대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공화당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재도전해 당선됐다. 임기 중 민주공화당 경기 제9지구당위원장과 중앙상무위원으 로 활동했다. 제7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난 후 1971년 삼원화학회장과 한국잉크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9대 총선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해 정계에서 은퇴했 다. 1985년 3월 17일 향년 71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 인물연감』, 『역대 국회의원 총람』, 『동아일보』, 『경향신문』
『사진으로 본 국회 20년 부록 -역대국회의원 약력』



정존수鄭存秀(1910∼1993)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계암溪巖이다. 현덕면 인광리에서 출생했다. 경기고등학교와 경성 법전을 졸업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해 서울지방법원 판사와 수원지방법원장을 역임했다. 1954년 정치에 뜻을 두어 자유당에 입당했다. 수원시에서 제3대 국회의원에 입후보해 당 선됐다. 1957년 자유당 경기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 거 시 지역구인 수원에서 고향인 평택군으로 옮겨 자유당 공천을 받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내에서 감찰위원장 및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대통령 선거에 부 정개입 한 죄로 구속 수감생활을 했다. 제5대 국회의원에 옥중 출마했으나 자진 사퇴했다. 1967년도 제7대 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계를 떠났다. 은퇴 후 수원시 고문 변호사로 활약하다 1993년 향년 83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묘는 천안시 광 덕산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동아일보』, 『경향신문』



차규헌車圭憲(1929∼2011)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승담昇潭이다. 장안동에서 출생했다. 경기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 고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졸업했다. 한국전쟁 시 중대장·대대장으로 가칠봉加七峰 풍암리豊岩里 전투에 참전 전공을 세웠으며 1차 중공군 춘계 공세 때에도 지휘관으로 용맹을 떨 쳤다. 이때 전공으로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미동성훈장 건국 보국 표창을 받았다. 이후 1967년 공무특전여단장, 1968년 보병7사단장 1975년 수경사령관, 1979년 수도군단장, 1980년 육사교장을 거쳐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했고 1981년 7월 11일 육군대장으로 진급해 제2군 사령관을 지냈다. 1983년 1월 31일 육군대장으로 예편해 동년 3월 국가비상위원회위원장(장관급)으로 활동했다. 1986년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1996년 12월 12일 군사반란 및 5·18 내란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돼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월형이 확정됐으나 그 해 12월 특별사면 돼 석방됐다. 2011년 5월 10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저서로는 임관 후 휴전까지 전투경험을 기록한 『전투』라는 책을 펴냈다. 묘는 장안동 산502번지 선산에 있다.

참고문헌 :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최석화崔錫和(1912∼1982)


본관은 수성隨城. 포승읍 석정리 115번지에서 출생했다. 1933년 중앙고보 졸업 후 보성전문학교에 진학해 법과를 1937년 졸업했다. 그 후 중앙고보 선배인 유승준俞昇浚과 충남 홍성군 소재 월계와 대현 2곳의 광산을 8년 간 경영했다. 해방 후 국민운동과 교육사업에 종사했으며 1947년 고향인 평택에서 민선 포승면장에 당선돼 1년 간 재임한 바 있다. 이후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1949년부터 1950년까지 국민당 중앙위원과 원내 간사 및 정치위원회 총무를 역임했다. 이후 제2대∼3대 국회의원에 계속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1960년 안중중학교 재단법인 이사와 한국화물자동차 주식회사 상무이사를 지냈으며 1972년 10월 유신 때 제헌국회의원의 친목단체인 제헌동지회 일원으로 유신헌법을 지지했다. 1982년 12월 9일 노환으로 향년 71세에 별세했다. 묘는 포승읍 석정리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 인사록』, 『역대국회 의원 총람』,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사진으로 본 국회 20년(부록)역대국회 의원약력』



최영희崔榮喜(1921∼2006)


본관은 수성隨城, 호는 벽파碧波이다. 서울에서 아버지 중덕과 어머니 강상봉 사이에서 2남으로 출생했다. 서울 휘문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전수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또한 미국조지워싱턴 대학원에서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1976년 2월 중화민국 학술원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해방을 맞아 국군창설 주역으로 군번 51번을 받았고 1946년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했다. 한국전쟁 시에는 낙동강, 다부동 등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태극무공훈장, 금성충무무공훈장, 은성충무공훈장, 미국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군주요 경력으로는 육군본부 초대 인사국장 헌병 사령관 사단장(5,8,15) 제2군사령관, 교육총장, 육군참모총장 연합창모본부 의장 등을 거쳐 중장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 1962년 터키·이 란·사우디·졸단 대사를 역임했다. 1967년 공화당에 입당 제7대 국회에 공화당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됐다. 1968년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 업무 수행 중 군 기밀 누출사건에 책임 을 지고 물러났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평택지역구에 출마 당선됐으며, 연이 어 제9∼10대 유정회 국회의원이 됐다. 원내 활동으로는 9대 때 국방위원장으로 10대에는 유신정우회 원내 총무로 활동 했고 1979년 유정회 의장이 됐다. 정계를 떠난 후인 1984년 한국지역 사회복지회 회장에 피선됐고 새마을사업에도 헌신했다. 2006년 1월 11일 향년 86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묘는 대전국립 현충원에 배우자와 함께 안장됐다.

참고문헌 : 『수성최씨 대동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허남훈許南薰(1937∼2006)


고덕면 동청리에서 출생. 1956년 경복고를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재학 중 행정고시와 사법고시를 합격했다. 1962년 서울법대 졸업 후 재무부 이재국에서부 터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 상공부 총무과장을 거쳐 감사관, 공업진흥관, 섬유공 업국장, 유통수입국장, 동력개발국장 등을 지냈다. 1978년 동자부 발족과 함께 동자부로 자리를 옮겨 전기국장을 맡았으며 1980년 동자부 기획관리실장으로 발탁됐다. 1986년 공 업진흥청장, 1988년에는 상공부 차관이 됐다. 1989년 국제무역 박람회 조직위원회 부위 원장 겸 사무총장에 임명돼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90년에는 환경처 장관으로 임 명돼 환경정책 예시제를 활용 공해업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공직 생활 중 평택에 LNG 가스, 평택 화력 유치 등 평택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퇴임 후 1993년 한국가스공사 이사장으로 고향인 평택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96년 정계에 입문해 자민련 후보로 제15대 국회의원이 됐다. 국회 내에서 농림해양수산위원으로 활동하며 평택항 선 석개발 유치 등 활동했으며 자민련 정책위의장 및 경기도당 위원 등을 역임했다. 2004년 제16대 국회의원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해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 후 매경 바이어스회장, 한 국가스공사사외이사, GS칼텍스 고문변호사를 했다. 1978년 홍조근정 훈장, 1992년 청조 근정훈장, 황조근정 훈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국가발전과 환경』, 『환경과 기업경영』이 있 다. 2006년 2월 10일 향년 70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묘는 고덕면 동청리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 『경향신문』, 『평택시민 신문』



황경수黃慶秀(1906∼1987)


본관은 창원. 평택에서 출생했다. 서울중동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 외과를 수료했다. 1930년 평택군 농업협동조합장을 시작으로, 1937년 평택군 농협의원으로 활동했다. 1939년 평택군 평택읍 제2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됐다. 1944년 조선상공회 평 택출장소장, 1949년 조선방직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다. 1953년 평택중·고등학교를 설 립 후 교장으로 취임해 후진 양성에도 진력했으며 이후 평택기호수리조합장과 경남수리조 합장, 대동산업회장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1954년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당선됐다. 국회에서 농업자금 특별위원장, 수해대책위원장, 애국선열 유족후원회 장을 맡아 활동했다. 1957년 FAO 한국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58년 자유당 원내 활 동에 비협조적이고 당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제명 당했다. 제4대 국회의원에 입 후보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민정당 평택지구당 조직책이 돼 중앙당정책 조정위원회 농림 상공위원장을 했다. 1987년 향년 87세에 숙환으로 별세했으며 묘는 현덕면 광덕 선영에 있다.

참고문헌 : 『평택군지』





(김인덕_청암대학교 교수)

(이재명_평택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