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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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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 및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인구이동으로 성씨가 많이 변동했다. 팽성·송탄 미군기지 형성과 국가·지방공단 조성 등에 따라 정착한 이주민 성씨가 급격히 늘어났다.
2000년 통계청 전국성씨 및 본관 조사보고서에 전국에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고 평택도 107개 성姓과 2,569개의 본관이 있다. 이 중 평택·진위·용성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진위김씨·평택박씨·진위이씨·평택임씨·용성송씨등 5개 성씨에서 12개 성씨가 더 늘어났다. 인구 순위는 김해김씨가 7,859가구 26,127명이고 전주이씨 7,165가구 23,616명, 밀양박씨 6,257가구 20,761명 순이다.
조선시대에는 토성이 주로 살았으나 한국전쟁 이후 월남 이주민의 정착과 미군기지 형성, 산업단지 조성 등 급격한 사회변화에 따라 생계 목적의 정착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진위 채소단지에는 서울근교 농업을 하던 사람들이 이주해 정착한 사람들도 많다.
평택시에 거주하는 성씨별 동족마을과 본관별 성씨는 다음과 같으며 본관별 성씨는 300가구 인구 1,000명 이상에 국한했다.



[평택시 거주 성씨 및 본관 수 - 107개 성 2,569본관]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연번 성씨 본관수 연번 성씨 본관수 연번 성씨 본관수 연번 성씨 본관수
1 강康 13 30 방方 16 59 오吳 55 88 주周 15
2 강姜 30 31 방方 7 60 옥玉 7 89 지池 13
3 강彊 1 32 배裵 39 61 왕王 6 90 진陣 30
4 경慶 1 33 백白 28 62 용龍 5 91 진陣 10
5 고高 30 34 변卞 10 63 우禹 13 92 차車 21
6 공孔 8 35 변邊 13 64 원元 9 93 채蔡 11
7 곽郭 19 36 봉奉 6 65 위魏 7 94 천千 24
8 구具 17 37 서徐 46 66 유柳 48 95 최催 118
9 구丘 1 38 석石 14 67 유兪 30 96 추秋 16
10 국鞠 5 39 선宣 5 68 유庾 2 97 탁卓 3
11 권權 12 40 설薛 8 69 유劉 27 98 편片 10
12 금琴 6 41 성成 13 70 육陸 2 99 표表 9
13 기奇 3 42 소蘇 2 71 윤尹 43 100 하河 13
14 길吉 8 43 손孫 25 72 은殷 4 101 한韓 37
15 김金 223 44 송宋 44 73 이李 205 102 한漢 3
16 나羅 14 45 신申 46 74 인印 6 103 함咸 12
17 남南 17 46 신辛 9 75 임林 84 104 허許 29
18 남궁南宮 1 47 신愼 3 76 임任 25 105 현玄 28
19 노盧 37 48 심沈 16 77 장張 58 106 홍洪 37
20 노魯 12 49 안安 34 78 장蔣 1 107 황黃 53
21 도都 7 50 양梁 24 79 전全 62      
22 마馬 5 51 양楊 9 80 전田 31      
23 맹孟 2 52 어魚 4 81 정鄭 111      
24 명明 5 53 엄嚴 8 82 정丁 17      
25 모牟 2 54 여呂 16 83 정程 13      
26 문文 40 55 여余 3 84 제諸 4      
27 민閔 11 56 연延 9 85 조趙 55      
28 박朴 90 57 염廉 10 86 조曺 20      
29 반潘 6 58 예芮 6 87 주朱 24      


진주강씨晋州姜氏


진주강씨 시조는 강이식姜以式이다. 고구려 영양왕(597년) 때 도원수都元帥를 역임하고 수나라 문제文帝가 30만 대군으로 쳐들어왔을 때 5만 병력으로 물리쳤다.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100만 대군으로 침공했을 때 을지문덕 장군과 살수대첩에서 승리하는데 공헌했 다. 통일신라시대 강진姜縉이 진주지역 진양후晉陽候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진주로 했다. 강 씨의 본관은 문헌상 진주·금천·안동·백천·해미·동복·광주 등 7본인데 모두 진주의 지파이며 현전하는 강씨는 모두 진주강씨에서 분적 했다.


평택은 주로 박사공파 18대 (통정공파 12대)인 강호보姜浩溥(1690~1778), 위보渭溥(초명은 연보淵溥) (1694~1780) 형제의 후손들이며, 조선 숙종때인 1710년경 강호보가 평택의 김해 김씨와 혼인으로 모친 안동김씨와 누이와 팽성 함정리 선마을 근처에 입향조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후손들이 팽성읍 남산리 등에 주로 정착하였다.

박사공파(통계공파)는 포승읍 석정리에 1720년경 정착해 현재 20여 세대가 있다. 이 밖에 소감공파·시중공파·은열공파·인헌공파가 각 읍면에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300,724가구 966,710명, 평택시에 1,693가구 5,611명이 있다.


제주고씨濟州高氏


제주고씨 시조는 고을나高乙那다. 탐라개국 설화에 한라산 기슭 삼성혈三姓穴에서 고을나·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세 신인이 출현해 그중 고을나가 제주목濟州牧에 정착해 제주고씨의 시조가 되었다. 평택에는 집성촌은 없다. 2000년 인구조사에 전국 100,954가구 325,951명, 평택시에 660가구 2,228명이 있다.


곡부공씨曲阜孔氏


공씨 시조는 문선공文宣公 공자孔子다. 공자의 53세손인 공완孔浣의 둘째 아들 공소孔紹가 원나라 순제順帝때 한림학사雗林學士를 지내다가 1351년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배종해 고려에 들어와 귀화했다. 이후 문하시랑평장사文下侍郞平章事로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지고 관향은 창원昌原을 받아 우리나라 공씨의 시조가 되고 이후 후손들이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개관했다.
어촌공파漁村公派와 고산공파孤山公派가 있고 평택은 주로 어촌공파다. 공자의 57세손인 공부孔俯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가 수원부 광덕현 덕목리(현 현덕면 덕목리)로 정착, 근 600여 년간 세거해 현재까지 후손들이 있다. 집성촌은 현덕면 기산리 덕목리에 120세대가 살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22,758가구 총 73,093명, 평택시에 505가구 1,562명이 있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안동권씨 시조 권행權幸은 원래 신라 왕실의 후예로 본명은 김행金幸이다. 권행은 고려 태조와 함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창업에 공을 세웠다. 태조가 권씨 성을 하사하고 태사太師 작위를 제수했다. 권행은 안동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후손들은 본관을 안동으로 삼았다.
평택은 주로 추밀공파樞密公派이며 집성촌은 진위면 가곡리 30여 호와 비전동에 주로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96,566가구 629,291명, 평택시에 1,085가구 3,661명이 있다.


김해김씨金海金氏


김해김씨 시조는 김수로金首露다. 삼국유사 설화에 가락국駕洛國의 아도我刀·오도五刀·피도彼刀·여도汝刀·오천五天·신귀神鬼·유수留水·유천留天·신천神天 등 아홉 촌장이 구지봉 산정에서 나라를 통솔할 군장君長을 뽑을 때 금합을 발견해 열어보니 여섯 동자가 나왔다.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 이름 짓고 금합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로 했다. 가락駕洛은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다.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하여 이어오고 있다.
평택에는 집성촌은 없으나 각 마을마다 고루 분포해 있다. 김해김씨는 전국적으로 제일 많은 씨족이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295,080가구 4,124,934명, 평택시에 7,859 가구 26,127명이 있다. 분파로는 판도판서공파判圖判書公派와 안경공파安敬公派가 많다.


경주김씨慶州金氏


경주김씨는 신라 왕실 3성 중 하나이며 시조는 김알지金閼智다. 탈해왕이 금궤에서 태어 났다 하여 성을 ‘김’으로 했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의 아들 9형제가 분적해 나가고 셋째 아들 김명종, 넷째 아들 김은열, 김순응 장군 후손들만 경주김씨를 본 관으로 하여 이어오고 있다.
평택에는 공호공파共胡公派·판윤공파判尹公派·상촌공파桑村公派·부제학공파副提學公·구령공파龜岭公派·갈천공파葛川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공절공파共節公派 등이 있다. 집성촌은 팽성읍 대사리, 고덕면 여염리·해창리, 청북면 어소리, 현덕면 장수리·운정 리, 안중읍 학현리에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542,018가구 총 1,736,798명, 평 택시에 4,623가구 15,118명이 있다.


광산김씨光山金氏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신무왕神武王의 셋째아들이다.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 자 경주를 떠나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에 자리 잡았다. 고려태조가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봉해 후손들은 광산을 본관으로 하여 이어오고 있다. 익경益炅은 사계 김장생 선생 의 손자로 시조 흥광의 29세손이다. 조선 효종 때 수원 용성현龍城縣(현 청북면 옥길리)으 로 낙향해 350여 년을 세거하면서 후손이 13세에 이른다.
평택은 주로 문원공파계文元公派系이며 세거지는 청북면 옥길리와 송탄 우곡마을에 집성 촌을 이루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258,936가구 총 837,008명, 평택시에 1,702 가구 총 5,646명이 있다.


안동김씨安東金氏


안동김씨 시조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구안동과 고려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안동의 두 계통이다.
평택은 구 안동김씨의 군사공파君事公派가 주로 세거하며 집성촌은 서탄면 사리 일대에 100여 세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50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5,068가구 47,702명, 평택시에 902가구 3,041명이 있다.


김녕김씨金寧金氏


김녕김씨 시조는 김시흥金時興이다. 김시흥은 신라 56대 경순왕의 제4자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경상북도 의성출신이다.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김녕金寧으로 삼고 이어오고 있다.
평택에는 백촌공파白村公派가 주로 세거하며 안중읍 학현리와 삼정리·고덕면 여염리·세교동 등에 살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62,204가구 513,015명, 평택시에 755가구 2,443명이 있다.


의성김씨義城金氏


의성김씨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4째 아들인 김석金錫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외손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본관을 의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고려 개국과 함께 문호를 개방한 의성김씨는 8세손 김공우金公禹 대에서 크게 번창했다. 김공의 장자 김용차가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고 차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평택에는 수사공 김용필의 후손인 사제공파思齊公派가 주로 살고 있으며 집성촌으로는 서탄면 적봉리에 40여 호 있었으나 1952년 K-55 미공군기지가 건설되면서 여러 곳으로 분산됐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에 79,368가구 253,309명, 평택시에 366가구 1,261명이 있다


교하노씨交河盧氏


교하노씨 시조는 노오盧塢이다. 당나라에서 한림학사韓林學士를 지내고 신라에 온 도시조 노수盧穗의 둘째 아들로 교하백交河伯에 봉해졌다. 노오盧塢의 후손인 노강필盧康弼이 기계杞溪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장산章山으로 했으나 고려 초에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되었고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지자 다시 교하로 복관했다.
평택에는 창성군파昌城君派가 있고 집성촌은 동삭동에 50여 호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6,561가구 53,203명, 평택시에 199가구 663명이 있다.


남평문씨南平文氏


남평문씨 시조는 문다성文多省이다. 문다성은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지고 무성武成의 시호를 받았다. 후손들이 시조로 삼고 남평을 관향으로 했다.
평택에는 순질공파純質公派가 주종이다. 중시조인 익점益漸의 12세손인 일신逸信이 조선 숙종 때 용인군 이동면 목신에서 수원부 종덕면 율포리로 이주했다가 좌교리에 정착해 근 300여 년간 번창했다. 집성촌은 고덕면 좌교리에 약 60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18,491가구 380,530명, 평택시에 733가구 2,419명이 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밀양박씨 시조는 박언침朴彦忱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의 맏 아들로서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밀양으로 하여 이어오고 있다.
평택은 주로 밀성군파密城君派이며 집성촌은 없으나 진위지역 등에 고루 거주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946,307가구 3,031,478명, 평택시에 6,257가구 20,761명 이 있다.


반남박씨潘南朴氏


반남박씨 시조 응주應珠는 반남(나주의 속현)에서 세거하던 호족의 후예로 호장을 지냈 다. 6세손 박은朴訔이 조선 태종 때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익대동덕좌명공신翊戴同德佐命功臣 좌의정으로 반남군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진봉된 이후 후손이 응주를 선 조 1세조로 하고 본관을 반남으로 삼았다.
평택에는 호군공파護軍公派가 많으며 집성촌은 포승읍 석정리 일원에 50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43,300가구 139,438명, 평택시에 383가구 1,272명이 있다.


함양박씨咸陽朴氏


함양박씨 시조는 박언신朴彦信이다. 신라 경명왕의 셋째 아들로 속함대군速咸大君에 봉해 져 후손들이 시조로 삼았다. 고려시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진 박선朴善이 중시조이며 함양을 관향으로 삼았다.
평택은 주로 360여 년 전에 입향한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가 있으며 집성촌은 포승읍 방림 4리, 신영리 등에 40여 호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38,788가구 123,688명, 평택시에 249가구 798명이 있다.


죽산박씨竹山朴氏


죽산박씨 시조는 박기오朴奇悟다. 신라시대 경명왕의 넷째 아들인 죽성대군 박언랍朴彦立의 아들로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우고 태조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보三重大匡太保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죽주(지금의 죽산)를 본관으로 삼았다.
평택에는 문헌공파文憲公派 자손들이 많으며 집성촌은 고덕면 좌교리에 40호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6,816가구 총 53,489명, 평택시에 138가구 478명이 있다.


고령박씨高靈朴氏


고령박씨 시조는 박혁거세의 29세손 경명왕景明王의 2자인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이다. 후손들이 고양高陽과 영천靈川의 두 지명을 합친 고령高靈을 본관으로 삼았다. 평택에는 부창정공副倉正公 박환朴還의 후손인 감사공파監司公派가 주로 세거하며 집성촌은 안중읍 덕우2리(20여 세대)와 대반4리에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2,301가구 총 39,239명, 평택시에 84가구 309명이 있다.


수원백씨水原白氏


수원백씨 시조는 백우경白宇經이다. 고대 전설인 황제 헌원씨軒轅氏 16세손 백을병白乙丙의 후손이며 중국 소주蘇州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첨의사僉議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선덕여왕 때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밑에 정착한 후 영월당迎月堂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에 진력했다. 상계가 실전돼 중간세계는 알 수가 없지만 신라 경덕왕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된 백창직白昌稷을 중시조로 삼아 수원水原을 본관으로 했다.
평택에는 문경공파文敬公派가 많으며 집성촌은 청북면 한산리(23가구), 팽성읍 본정리(14가구) 등이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98,748가구 316,535명, 평택시에 765가구 2,572명이 있다.


온양방씨溫陽方氏


온양방씨는 서기669년(신라 문무왕 9)에 당나라 한림학사로 신라에 귀화한 방지方智가 시조다. 평택에는 주로 간의공파諫議公派가 있으며 중시조 온수군 방운方雲의 17세손인 방치연方致延이 약 600여 년 전 평택시 팽성읍에 정착했다. 집성촌은 팽성읍 원정리와(40여 세대) 청북면 옥길리(20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9,961가구 64,128명, 평택시에 384가구 1,138명이 있다.


달성서씨澾城徐氏


달성서씨 시조는 서진徐晋이다.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거쳐 공 을 세워 달성군澾城君에 봉해졌다. 달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세거하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달성으로 했다.
평택에는 주로 도위공파都尉公派가 포승읍 신영리·오성면 숙성리·교포리·당거리·창 내리·죽리에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32,270가구 429,353명, 평택시에 970 세대 3,200명이 있다.


진주소씨晋州蘇氏


진주소씨의 시조는 소알천蘇閼川으로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때 귀족회의 의장 겸 상대등 이었다.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귀족회의에서 왕위를 제의받았으나 사양하고 김춘추를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660년경에 진주로 이거하면서 경을 족보상 1세 로 하여 진주소씨 시조로 삼았다.
1363년 26세 판도판서版圖判書 개성윤開城尹 소을경蘇乙卿과 22세 소함장군蘇函將軍이 몽 고의 난 전공으로 하사받은 진위현으로 이거했다. 650여 년 동안 평택·안성·용인지역에 세거하며 집성촌은 동삭동(영신마을)에 40여 호가 있다. 평택지역 진주 소씨는 귀족세력으 로 지역의 유력 성씨들과 혼인을 맺으면서 조선조까지 힘 있는 토호세력으로 영향력이 있 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1,521가구 37,184명, 평택시에 112가구 358명이 있다


평산신씨平山申氏


평산신씨 시조는 고려 창업 1등 공신 신숭겸申崇謙이다. 초명初名이 능산能山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숭겸은 전라도 곡성谷城에서 태어났으나 광해주光海州(춘천)로 이주해 성장 했다.
평택에 정착한 신감申鑑은 파조인 사간공思簡公의 10세손이다. 조선 인조 때 광주 낙생면廣州 樂生面에서 수원부 광덕현 대안리(현 현덕면 대안리) 병자호란 피난처로 정착 해 300여 년을 세거하고 있다. 특히 현덕면 대안리 일대에는 평산신씨 사간공파 자손이 110세대로 집단 성씨촌이었으나 현재는 10여 세대만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54,612가구 496,874명, 평택시에 1,137세대 3,741명이 있다.


고령신씨高靈申氏


고령신씨 시조는 신라 공족의 후예인 신성용申成用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했다. 그의 선조들이 오랫동안 고령에 살면서 호장戶長을 지내 후손들이 본관을 고령으로 삼았다. 평택에 입향한 것은 시조 성용成用의 13세손이다. 파시조派始祖 봉례공 주의 증손자인 부가 임진왜란 때 서해안 선편으로 정착한 곳이 수원부 용성현(현 청북면 고잔리, 고렴리 일대)이었다. 후손들이 번창해 고령신씨 집성촌이 됐다.
평택지역은 봉례공파奉禮公派가 주축이며 집성촌은 청북면 고잔리·고렴리·삼계리·현곡리로 150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36,250세대 116,966명, 평택시에 521가구 1,595명이 있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순흥안씨 시조는 안자미安子美다. 고려 신종조에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냈고 4세손인 안향安珦의 귀현으로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됐다. 후손들은 순흥현順興縣에서 오래 살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순흥안씨는 3개 파로 안자미의 아들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가 1·2·3파로 나뉜다.
평택지방은 1파인 추밀공파樞密公派와 3파인 교서공파校書公派가 있으며 집성촌은 진위면 마산리(20여 호), 오성면 안화리(20여 호), 팽성읍 두리(20여 호)이며 고덕면 두릉리와 현덕면 신왕리에 각각 10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45,254가구 468,827명, 평택시에 1,409가구 4,590명이 있다.


원주원씨原州元氏


중국 원씨 시작은 서기 633년 주나라 천자가 원이라는 성을 내린 것이 시초이다. 우리나라 원씨 시조는 원경元鏡인데 당태종이 고구려에 파견한 8학사學士 중 한사람이었다. 원주원씨 원사源史에 그는 당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고구려와의 국교를 위해 힘을 써 고구려 보장왕이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했다한다.
원씨는 관향이 원주단본으로 3개 파가 있다. 운곡계耘谷系·원성백계原城伯系·시중공계侍中公系이며 평택은 원성백계 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다. 입향조는 시조 원성백原城伯 극유克猷의 15대손 삼사좌윤공 선의 손자인 원몽元蒙이다. 양주송산楊州松山에서 은거하다가 1398년(태조 7)에 진위현 여좌동余佐洞(현 도일동)에 정착해 600여 년간 세거했다. 한때 100여 호에 달했으나 지금은 80여 호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원주원씨는 전국 33,655가구 109,505명, 평택시에 509가구 1,592명이 있다.


남원양씨南原梁氏


남원양씨 원래 시조는 탐라국 개국신화의 삼신 중 한사람인 양을나梁乙那다. 757년(경덕 왕 16) 양우량이 큰 공을 세워 남원부 남원백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이 남원을 관적으로 했 다. 평택에는 병부공파兵部公派와 문양공파文陽公派가 있으며 집성촌은 고덕면 율포리 10여 호와 팽성읍에 20여 호가 세거한다. 남원양씨는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67,691가구 218,546명, 평택시에 554가구 1,834명이 있다.


파주염씨坡州廉氏


파주염씨 시조는 염형명廉邢明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 공신三韓壁上功臣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봉성현(현 파주)에 대대로 살아 본관이 봉성이었 다. 중시조인 염제신廉悌臣이 곡성부원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곡성으로 개관했다. 이후 봉 성이 서원으로 지명이 바뀌고 서원이 또한 파주로 바뀌어 본관을 파주로 했다.
평택에는 국파공파菊坡公派가 있고 집성촌은 고덕면 좌교 3리와 해창 1리에 20여 호가 있 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6,628가구 53,539명, 평택시에 158가구 494명이 있다.


단양우씨丹陽禹氏


우씨의 선세계는 중국 은나라 우왕禹王의 후예다. 문헌이 실전失傳돼 그 선계는 알 수 없다. 우현禹玄이 고려 때 단양에 세거하면서 문과 급제 후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내고 문 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됐다. 그의 9세손 우현보禹玄宝가 단양 부원군에 봉해지 면서 후손들이 단양丹陽을 본관으로 삼았다.
평택은 안정공파安靖公派가 주로 세거하며 집성촌은 진위면 마산리와 은산리에 10여 세대 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50,789가구 162,479명, 평택시에 451가구 1,482명 이 있다.


기계유씨杞溪兪氏


기계유씨 시조는 신라 때 아찬阿湌 벼슬을 한 유삼재兪三다. 유의신兪義臣이 신라를 무 너뜨린 고려에 불복하자 태조가 기계현杞溪縣 호장戶長으로 강등시킨 후 후손들이 세거하 고 본관을 기계로 했다.
평택은 주로 단성공파丹城公派이며 집성촌은 포승읍 신영리에 20여 호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34,984가구 113,430명, 평택시에 427가구 1,292명이 있다.


파평윤씨坡平尹氏


파평윤씨 시조는 윤신달尹莘達이다. 고려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해 개국통합삼한벽상익찬開國慟合三韓壁上翊贊 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가 되었고 소양昭蘘 시호를 받았다. 5세손인 윤관尹瓘이 여진정벌에 공을 세워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으로 책록 돼 영평현鈴平縣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졌다. 영평은 파평의 별호로 후손들이 파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평택은 시조부터 25세손 윤호尹昊가 조선 정조 때 지제동(울성리)에 정착했다. 평택에 세거하는 분파는 대언공파代言公派·소정공파昭靖公派·판도공파版圖公派·태위공파太尉公派·남원공파南原公派이며 집성촌은 없으나 고루 분포돼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221,477가구 713,947명, 평택시에 1,597가구 5,307명이 있다.


칠원윤씨漆原尹氏


칠원윤씨 시조는 신라 태종 무열왕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낸 윤시영尹始榮이다. 경신보庚申譜 상계편上系篇 시조 설화에 칠원현에 사는 윤씨 부인이 꿈에 신인이 아들을 낳거든 시영이라 하라고 했다한다. 세록편世錄遍에 윤시영이 칠원백漆原伯 혹 호장랑戶長郞을 지냈다하며 7대에 걸쳐 봉군封君했다한다. 고려 때 칠원현의 호장보윤戶長甫尹을 지낸 윤거부尹鉅富를 중시조로 하여 이어오고 있다.
평택에는 충효공파忠孝公派 후손으로 판결사공파와 대언공파가 있다. 집성촌은 서탄면 사리와 수월암리에 30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6,829가구 54,263명, 평택시에 116가구 373명이 있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전주이씨 시조는 이한李翰이다. 선원선계璿源先系에 따르면 이한은 전주 토착 명문으로 덕망이 높고 문장이 탁월해 신라 문성왕文聖王때 사공司空을 지냈다. 후손이 대대로 전주에 세거해 본관을 전주로 했다. 조선왕조를 창건한 이성계李成桂는 시조 이한의 22세손으로 전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이후 자손이 크게 번성·현달해 파계도 여러 갈래로 나눠졌다. 성씨를 이를 때 제왕帝王은 불감조기조不敢祖其祖, 즉 조상으로 칭할 수 없기에 여러 왕자 또는 대군이나 군을 파조로 해 123개 파로 분파했다. 평택에는 팽성 안정1리에 덕천군파, 서탄 내천리에 의안대군파, 오성면 양교1리에 능원대군파, 청북면 고잔리·안중읍 덕우리·팽성읍 대추리와 대사리·서정동·비전동에 효령대군파, 포승읍 원정리·현덕면 권관리에 양녕대군파, 안중읍 학현리에 안풍대군파, 모곡동에 수도군파, 비전동에 광평대군파, 송북동과 신장동에 익양군파, 지제동(울성리)에 운천공파 등의 집성촌이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808,511가구 2,609,890명, 평 택시에 7,165가구 23,616명(평택시 인구의 약 5.6%)이 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경주이씨 시조는 신라 초기 육촌장六寸長 중 하나인 표암공剽巖公 알평謁平이다. 경주이씨 의 실질적 시조인 중시조는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이다. 거명은 신라 진골출신이다. 본 관은 발상지 양산촌楊山村이 경주慶州로 바뀌어 경주로 했다. 이씨 세계는 중시조 거명의 16대손에서 크게 8개 파로 나뉘었다. 8대파는 성암공파誠菴公派·이암공파怡菴公派·익제 공파益齊公派·호군공파護軍公派·국당공파菊堂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다.
평택에는 국당공파와 익제공파 후손들이 많으며 익제공파 집성촌으로 포승읍 홍원리 30 여 세대와 안중읍 성해리에 30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446,598가구 1,424,866명, 평택시에 3,355가구 11,278명이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


광주이씨 시조는 이자성李自成으로 칠원漆原에서 세거한 호족이며 신라 17대 내물왕柰勿王 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냈다. 신라 경순왕 때 고려가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켜 준 안호장准安戶長이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이 준안이었으나 940년(태조 23) 광주로 개칭돼 광주를 본관으로 했다. 이후 이자성부터 소목昭穆이 실전돼 고려 말에 현달했던 현조顯祖를 각1세조로 수보했다.
평택에는 광릉부원군파廣陵府院君派가 많다. 입향조入鄕祖인 기신基臣은 중시조인 광릉부 원군 극배克培의 12세손이고 별제공 수함守諴의 10세손으로 조선 순조 때 승정원 승지직 에서 물러나 진위 하북에 정착해 200여 년간 살고 있다. 집성촌은 진위면 하북리에 30 여 가구가 있고 안중읍 금곡4리·덕우1리, 장당동 등에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48,811가구 158,249명, 평택시에 574가구 1,849명이 있다.


함평이씨咸平李氏


함평이씨 시조 이언李彦은 고려 태조 때 신무위대장군神武衛大將軍이었고 후에 함풍군咸豊君 에 봉해졌다. 세록에 시조 이언이 함풍군에 봉해지면서 자손이 크게 번성해 관향貫鄕이 되었 고 조선시대 함풍과 모평牟平 두 현이 함평으로 고쳐져 후손들이 함평을 관향으로 삼았다. 평택에 정착한 것은 시조 언의 9세손인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낸 중길中吉이 고려가 망할 당시 포승읍 내기리 은곡으로 피신해 은거한 것이 시초라 한다. 평택에는 주로 대교공파待敎公派와 진사공파進士公派가 있으며 집성촌은 포승읍 내기리·희곡리·방림리에 132여 세대, 현덕면 방축리·운정리·인광리 등에 50여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38,852가구 125,419명, 평택시에 1,213가구 3,574명이 있다.


평창이씨平昌李氏


평창이씨 시조 이광李匡은 1126년(고려 인종 4)에 태어나 의종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평장사平章事를 거쳐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사太師에 이르렀고 백오군白烏君에 봉해졌다. 백오는 평창의 옛 이름이다. 이광의 8세손 이천기李天驥가 고려 공민왕 때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고 평창군平昌君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이 평창을 관향으로 삼았다. 평택 정착시기는 숙종과 영조때로 입향조는 익평공 이계남李季男의 7세손인 이만李墁이다. 현덕면·안중읍·포승읍 일대를 중심으로 번창했다. 집성촌은 현덕면 화양리·안중읍 현화리·현덕면 인광리에 100여 호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20,718가구 65,945명, 평택시에 271가구 868명이 있다.


용인이씨龍仁李氏


용인이씨 시조는 이길권李吉卷이다. 고려 태조를 도와 궁예와 견훤을 이기고 삼한통일에 공을 세웠다. 훈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가 되고 구성백驅城伯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용인을 본관으로 삼았다.
평택은 주로 참판공파參判公派이며 집성촌은 포승읍 만호리와 지제동이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9,796가구 총 32,050명, 평택시에 298가구 946명이 있다.


합천이씨陜川李氏


합천이씨 시조는 이개李開이다. 고려 건국 후 합천호장陜川戶長을 지냈다. 문충공사적기文忠公事蹟記에 최치원의 문인으로 유학 진흥에 힘써 강양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신라 6촌장 중 알천閼川 양산촌의 촌장이며 유리왕 때 이성을 하사받은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이다. 따라서 합천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분적된 성씨다. 합천호장을 지냈기 때문에 후손들이 합천을 관향으로 하고 있다.
평택의 집성촌은 포승읍 도곡리이며 현재 30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36,411가구 115,462명, 평택시에 133가구 431명이 있다.


덕수장씨德壽張氏


덕수장씨 시조 장순용張舜龍은 위구르계 사람이며 고려 충열왕忠烈王때 원나라 제국공주 를 시종해 들어와 귀화했다. 황해도 덕수현德壽縣에 살면서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내고 덕 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덕수현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덕수를 본관으 로 삼았다.
장수용의 손자인 장익張翊이 1393년(태조 2) 팽성읍 석근리로 낙향해 송화1리 개화마을 로 옮겨 세거하다가 석근2리 석다리와 대사1리로 나뉘었다. 1970년 석근리·송화리·대 사리 등에 집성촌 150여 세대가 있었고 현재 70여 호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6,531가구 21,006명, 평택시에 246세대 753명이 있다.


단양장씨丹陽張氏


단양장씨 시조는 장순익張順翼이다. 인동장씨 시조 장정필張貞弼의 증손인 장지현의 아들 로 고려 태조 때 개국공신이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단양 군丹陽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단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평택에는 안중읍 삼정1리에 20호 집성촌이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0,541가 구 33,295명, 평택시에 186가구 562명이 있다.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씨는 신라 유리왕 때 육부촌 진지촌장珍支村長인 지백호智伯虎를 정씨로 사성賜姓하면서 시작됐다. 동래정씨 세보에 지백호와의 관계는 문헌이 없어 상고할 수 없고 시조 정지원鄭之遠은 정회문鄭繪文의 원손이었다. 고려에서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내고 세거지인 동래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평택지역은 주로 창원공파昌原公派로 시조 회문繪文의 24세손 언철彦喆이 조선 경종 때 현 덕면 황산리에 정착해 300여 년간 세거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37,524가 구 442,363명, 평택시에 804가구 2,652명이 있다.


봉화정씨奉化鄭氏


봉화정씨 시조는 정공미鄭公美이다. 고려 초 정의대부正義大夫 호부령戶部令을 지냈고 983 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한 후 호장戶長이 됐다. 5세손 정도전鄭道傳이 창왕을 폐하 고 공양왕을 추대해 봉화현奉化縣, 충의군忠義君이 되고 봉화백奉化伯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봉화를 본관으로 이어오고 있다.
평택은 시조 공미公美의 8세손이며 파조 문헌공文憲公의 3세손 장손長孫이 세종 조에 진위면 은산리에 정착해 약 600년간 이어왔다. 1980년대 200여 세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40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7,272가구 23,173명, 평택에 192가구 655명이 있다.


해주정씨海州鄭氏


해주정씨 시조는 정숙鄭肅이다. 선계 문헌이 실전됐으나 해주 수양산首陽山에 세거하던 사족으로 고려 때 정씨를 사성賜姓받았다고 한다. 시조 정숙은 고려 신종 때 전법정랑典法正郞 중현대부中顯大夫 전객서령典客署令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고려 말 소부소윤少府少尹을 지낸 정언鄭娮과 대장군을 지낸 정초鄭初를 일세조로 삼고 해주를 본관으로 이어오고 있다.
평택은 주로 생원공파生員公派 후손이며 집성촌은 팽성읍 근내리에 120여 가구가 있었으나 현재는 40여 호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0,998가구 35,434명, 평택시에 187가구 602명이 있다.


연일정씨延日鄭氏


연일정씨 시조는 정종은鄭宗殷으로 득성조 지백호智伯虎의 원손이다. 신라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후손 정의경鄭宜卿이 영일호장迎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연일로 했다.
평택지역은 주로 포은공파圃隱公派로 집성촌은 오성면 양교리 죽리 등에 20여 호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67,418가구 216,510명, 평택시에 677가구 2,228명이 있다.


경주정씨慶州鄭氏


경주정씨 시조는 지백호智伯虎다. 삼한시대 진한辰韓 사로斯盧 6촌장의 하나인 진지부珍支部 촌장으로 신라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지면서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중시조 정진후鄭珍侯는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군기시윤軍器侍尹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면서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이어오고 있다.
평택은 추만공파楸巒公派가 있고 집성촌은 안중읍 안중5리(황금리)에 40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94,465가구 303,443명, 평택시에 900가구 2,950명이 있다.


한양조씨漢陽趙氏


한양조씨 시조는 조지수趙之壽다. 덕원부德原府 용진현龍津縣에서 세거한 사족의 후손으로 고려 명종 때 조순대부朝順大夫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하자 한양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영했고 본관을 한양으로 해 이어오고 있다.
28개 분파가 있고 평택에는 주로 참판공파參判公派가 많다. 입향조는 조택趙澤으로 지수 의 14대손이다. 한양에서 인조25년에 오성면 죽리로 낙향했다. 집성촌은 오성면 죽리와 안중읍 용성리에 300여 년 간 세거하고 있다. 300여 세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50여 호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95,206가구 307,746명, 평택시에 1,008가구 3,320명 이 있다.


풍양조씨豊壤趙氏


풍양조씨 시조는 조맹趙孟이다. 고려조 개국공신으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거 쳐 맹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받았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출생지인 풍양豊壤을 본 관으로 하여 이어오고 있다.
평택은 주로 준양공파准陽公派이며 집성촌으로는 오성면 금곡리에 10여 호가 있다. 2000 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35,009가구 113,798명, 평택시에 388가구 1,278명이 있다.


순창조씨淳昌趙氏


순창조씨는 호서와 호남 두개 파로 나뉜다. 호서파 시조는 고려 때 순창호장淳昌戶長을 지낸 조자장趙子長이고 호남파 시조는 고려 때 문학사 중 평장사를 지낸 조장趙璋이다. 순 창조씨 세보에 의하면 본관을 순창으로 한 것은 조자장의 5세손인 조인평趙仁平이 1177년 (명종 7)에 망이·망소이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워 금오위낭장金吾衛郎將과 대장군에 올랐 다. 후손과 가문이 번성해 토착지인 순창을 본관으로 이어오고 있다.
평택에는 문정공파가 많으며 집성촌은 서탄면 내천리에 36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 청 조사에 전국 5,669가구 17,923명, 평택시에 93가구 268명이 있다.


연안차씨延安車氏


연안차씨 시조는 차효전車孝全이다. 고려 창업에 공이 있어 태조가 대광백大匡伯 연안군延安君에 봉했다. 후손들이 연안을 본관으로 하여 이어오고 있다. 연안차씨는 19세기 문학공파文學公派·전서공파典書公派·월파공파月波公派·상장군공파上將君公派 등 크게 4개 파로분파됐다.
평택은 월파공파계로 월파 차종로의 3남인 차은재가 300여 년 전 장안동에 이거해 진사공파의 파조가 됐다. 집성촌은 장안동·지제동·서탄면 금암리에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50,168가구 161,325명, 평택시에 542가구 1,752명이 있다.


영양천씨穎陽千氏


영양천씨 시조는 천암千巖이다. 천씨는 중국 성씨이며 시조 천암은 명나라 때 도총장都總將 판도승상版圖丞相을 역임했는데 영양에 세거해 관향으로 삼았다. 중시조 천만리千萬里는 임진왜란 당시 황제의 명을 받아 조병 영양사 겸 총독장으로 왜군을 섬멸했고 정유재란에도 공을 세웠다. 전란이 평정된 후 두 아들과 조선에 남아 천씨의 시조가 됐다.
평택은 주로 정랑공파正郞公派의 후손이며 집성촌은 고덕면 당현1리에 20여 호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23,014가구 73,118명, 평택시에 133가구 420명이 있다.


수성최씨隋城催氏


수성최씨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후예로 본래 성이 김씨였던 최영규催永奎가 시조다. 1261년(고려 원종 2)에 문과에 등과해 숭록대부崇祿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 남부전서南部典書로 보문각대경宝文閣大卿을 겸직했고 서경 유수留守로 있으면서 명망이 높았다. 고려 충렬왕 때 왕이 수주지역 풍속이 퇴폐한 것을 개탄하자 최영규가 일 년 안에 바로 잡았다. 이에 왕이 수성백隋城伯에 봉하고 최씨 성을 하사해 수성최씨가 시작됐다.
평택에는 시조 최영규의 5세손 최경崔涇이 세조 때 진위현 여방면 의곡(도일동)에 정착하고 후손들이 진위현 탄현면 독곡동 오좌동마을, 송탄동 막곡, 포승읍 석정리와 도곡리 등으로 분동하면서 500여 년 간 이어가고 있다. 평택은 안양공파·찬성공파·가산공파가 있으며 집성촌은 송탄지역에 오좌동 막곡과 포승읍 석정리와 도곡리 등에 세거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5,964가구 51,964명, 평택시에 1,050가구 3,409명이 있다.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씨는 기자조선에 연원이 있다. 위만에 밀려 마한으로 온 준왕準王(기자의 40대 후손)의 8세손이 3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우량友諒이 신라의 상당上黨으로 옮겨 한씨라 칭했다고 전한다. 한씨의 시조는 기자의 후예 우량의 32세손 한란韓蘭이다. 한란은 고려 태조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태위三中大匡太尉에 올랐다. 청주 방정리에 세거했기 때문에 후손들은 청주를 본관으로 이어오고 있다.
평택에는 주로 양절공파襄節公派와 문정공파文靖公派가 세거하고 있다. 집성촌은 현덕면 대안4리에 40여세대로 가장 많고 칠괴동·포승읍 내기리·서탄면 금암3리 등이다. 2000 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199,642가구 642,992명, 평택시에 2,007세대 6,517명이 있다.


상주황씨尙州黃氏


상주황씨 시조는 도시조인 황락黃洛의 후손으로 고려 때 벼슬이 상주국上柱國인 황석주黃石柱를 일세로 한다. 6세손인 황효원黃孝原이 공조판서와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올랐 고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상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평택지역에는 상산군파가 주로 살며 집성촌은 현덕면 도대2리에 20여 세대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전국 2,173가구 7,031명, 평택시에 155가구 454명이 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