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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농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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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은 우리 선조들의 감성과 직감이 낳은 문화유산이다.
우리 민족의 심성이 가장 잘 표현된 민중의 음악이요 춤이다.
농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농경시대 이전인 수렵시대에 짐승몰이를 위한 타악기 사용이 시원이라는 설이 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악기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그러한 행위에서 마을 농악대가 형성되고 지신밟기와 두레농악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평택농악 당산굿 고사

| 평택농악 당산굿 고사 |



농악은 지역에 따라 명칭도 조금씩 달라지고 내용과 형식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2)
농악은 풍물·두레·풍장·굿이라고도 한다. 김매기·논매기·모심기 등 힘든 일을 할 때 일의 능률을 올리고 피로를 덜며 협동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데서 비롯됐다.
각종 명절이나 동제洞祭·걸립굿·두레굿과 같은 의식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대한민국 6대 농악 분포도

| 대한민국 6대 농악 분포도 |



우리나라 농악은 크게 평택농악이 속한 웃다리농악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산악지역의 호남좌도농악, 전라도 평야지역의 호남우도농악, 경상도 지방의 영남농악, 태백산맥 너머의 영동농악 등으로 나누어진다. 각 지역에는 그 지역의 대표성을 인정받은 농악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현재 6개3) 농악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이다.
특히 웃다리농악은 경기도를 포함해 서울·인천 수도권과 대전·충청지방, 강원도 영서지방에 전승되는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충청·강원지역까지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는 대표적인 농악이다.



구한말 사당패

| 구한말 사당패 |



1985년 12월 1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됐다.
흔히 경기평야로 불리는 농경지는 남부지방의 진위천·안성천 유역의 드넓은 평택평야와 경기도 북서부 한강 하류에 펼쳐진 김포평야를 말한다.
지금의 김포평야는 신도시 등 급격한 도시개발이 이뤄졌고, 평택지역도 각종 개발 사업으로 인해 농경지가 줄어들긴 했지만 백리 평택평야가 그나마 경기평야의 이름값을 하고있다.

경기도 평택지역은 소샛들(소사평)이라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주곡인 쌀을 비롯한 농산물이 풍요했고 이러한 산물産物의 풍요는 농민문화를 일으켜 평택지방의 농악을 이루게 됐다.

일찍부터 소샛들을 낀 여러 고장은 사당패寺黨牌들의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의 사당패 중에서도 평택 진위지방을 중심으로 유세기의 아버지가 주도한 진위사당패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농악도 발달했다.4)
사당패는 평택의 소사뜰·오성뜰, 진위 장안뜰, 성환 둔포뜰, 멀리는 예산·삽교·당진합덕뜰에 이르기까지 놀이판을 펼쳤다.

하지만 남사당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강압으로 자취를 감추게 됐고, 명맥을 유지한 것이 평택걸립패였다.

걸립패는 교량·학교·관공서등을 건립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됐고, 또한 개인적으로는 생계유지 수단이기도 했다.5)

평택농악은 이때부터 두레풍물과 걸립풍물굿을 가장 잘 계승한 웃다리 지역을 대표하는 풍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두레농악에서 하던 지신밟기·두레굿과 더불어 난장굿·절걸립·촌걸립 등 걸립패에서 하던 전문연희패적 요소가 함께 나타나는 형태다.

이는 최은창이 전문 연희패에서 활동했고 초기 구성원들이 서울·경기남부·천안·공주 지역에 흩어진 명인들로 구성돼 전문연희패적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즉, 평택농악은 팽성읍 평궁리 마을의 두레농악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평택의 두레농악을 대표한다기보다는 경기·충청지방 전문연희패의 가락과 판제를 계승한 웃다리농악이라고 할 수 있다.
평택·안성·화성 등지의 농악은 이른바 평택농악의 전형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을 갖는 농악은 경기도·강원도 서부·충청도 등 ‘웃다리’라는 명칭으로 매우 넓은 지역에 분포돼 있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彭城邑 평궁리平宮里는 평택시가지에서 남서쪽으로 2㎞쯤 떨어져 있는 농촌마을이다. 이 마을에서는 옛 부터 지신地神밟기와 두레굿 등 여러 농악이 성행했다.

‘평택농악平澤農樂’ 이라는 명칭은 한국전쟁 직후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기념해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였다.
평택농악의 명인 최은창崔殷昌은 당시 평택군의 요청으로 농악패를 구성해 ‘평택농악’ 이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나갔다.

지금 광화문 뒤쪽 중앙청 앞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평택농악은 1958년과 1959년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평택농악의 계보에 중요한 유세기는 1984년 당시 91세의 나이로 전국 5대 놀이패인 진위패를 육성했고 농악과 시조 등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원형 시조 창법』6)이 있고, 작고할 때까지 평택 진위면에 거주했다.
특히 유세기의 부친은 당시 진위현 관청에 소속된 관리인 아전이면서 솥을 만들어 파는 솥전을 대대적으로 경영하며 전국에서 농악에 소질 있는 자들을 종업원으로 등용하고 농악을 연마시켰다.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자 경복궁 건축 위안공연에서 대원군으로부터 ‘진위군도대방권농지기都大房旗’라는 농기와 3색 어깨띠를 하사받고, 당시 상쇠 김덕일에게 ‘오위장五衛將’이란 벼슬을 내려준 사실이 있다. 당시에는 진위농악이 경기농악을 대표할 만한 실력이 있었고, 전국에서도 유명했다.7)

일제강점기 초에 전국적으로 남사당패 놀이를 금지했으나 유세기가 안성경찰서에 경부로 재직하면서 유일하게 안성경찰서만이 남사당패놀이를 허가해 주었다.8)

유세기 고택

| 유세기 고택 |



이런 이유로 전국의 남사당패들이 평택·안성지역에 집중 이주해 진위와 청룡사를 본거지로 삼았다.9) 남사당패의 농악이 발달하여 평택·안성·화성등지의 농악은 이른바 경기농악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게 됐으며 따라서 농악은 경기도·충청도 전역과 강원도 서부 등 매우 넓은 지역에 분포돼 왔다.10)
이후 평택농악은 절걸립으로 근근이 유지돼오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해체된다.
이때부터 평택농악 명인 최은창은 고향 평궁리에서 농사일을 하는 한편 간간히 지금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의 전신인 ‘민속극회 남사당’ 활동을 해왔다.
평택농악이 현재와 같은 편제를 갖춘 것은 1980년대 초부터다. 작고한 상쇠 최은창崔殷昌과 수법고 이돌천李乭川 등 명인들이 평택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 살면서 농악을 했다.

1980년에는 평택군과 평택문화원에서 최은창을 중심으로 평택·안성·천안·서울 등지에서 불러온 전문연희패 출신들과 평택지역에서 이름이 나 있던 사람, 그리고 평궁리 마을사람들로 편성된 평택농악팀을 만들어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참가해 공연했다. 그러나 공연 수준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대상을 주지 않고 예정에도 없던 특별상을 받게 되자 참가 단원들이 반발했고 이를 달래기 위해 제주도지사가 직접 나서 제주도 일주 관광을 시켜주는 것으로사태를 일단락했다.11)


평택농악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참가

| 평택농악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참가 |



이를 계기로 1985년 12월 상쇠 최은창과 수법고 이돌천이 평택농악 예능보유자가 됐으며, 1986년 12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의 보유단체로 평택농악보존회가 지정받았다. 평택농악이 전통적인 웃다리농악의 가락과 판제를 이어온 것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주석

2) 국립문화재연구소, 『중요무형문화재 평택농악 영상기록』, 1997.
3)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6대 농악은 제11-1호 진주삼천포농악, 제11-2호 평택농악,  제11-3호 이리          농악,; 제11-4호 임실필봉농악, 제11-5호 강릉농악, 제11-6호 구례잔수농악이다.
4) 심우성, 『남사당패연구』, 동화출판공사, 1974, p.45에는 1900년대 초에 있었던 진위남사당의  후대로 심옥선패가      1930년대에도 활동했음이 소개됐다.
5) 평택문화원, 『소사벌 창간호』, 1984.
6) 유세기, 『원형시조창법』, 1967.
7) 평택문화원, 『소사벌 창간호』, 1984.
8) 박성복, 『평택민속지 상권』, 평택문화원, 2009, p.389.
9) 심우성, 『남사당패연구』, 동화출판공사, 1974, p.149.
10) 평택군문화원, 『평택문화 창간호』, 1992.
11) 평택농악보존회장 최은창의 증언, 2001년, 박성복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