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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백李東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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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졸 년 : 1866∼1950년

활동분야 : 소리꾼 / 판소리 중고제의 명창·근대 판소리 5대 명창·마지막 창자

출 생 지 : 충청남도 서천군


이동백의 본명은 이종기李鍾琦로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庇仁에서 태어나 13세 때 김정근金正根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공부하고, 김세종金世宗에게 5년간 소리 공부를 했다. 20세 전후에 비인 도만리 호리산 용구龍口에 움을 파고 들어가 2년간 독공獨工했고, 다시 진주 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했다. 절에서 나온 후 창원부사의 부름으로 ‘새타령’을 불러 이름을 떨쳤다. 36세 이후 경상남도 창원에 거주하면서 명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46세 때 서울로 올라와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과 함께 원각사圓覺社에서 창극을 공연했고, 원각사가 해산된 뒤 연흥사延興社·광무대光武臺 등에서 송만갑과 함께 창극과 판소리를 공연했다.
1933년 송만갑·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해 판소리 교육에 힘썼으며, 창극을 바로 세우는데도 힘을 보탰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들이 소위 근대 5명창으로 불리는 이동백·김창환·송만갑·김창룡·정정렬 등이다. 근대 5명창 중에서도 당대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명창이 바로 이동백이다. 그는 수려한 외모와 선천적으로 타고난 소리, 뛰어난 몸짓으로 20세기 전반 음악계를 주도했으며 판소리 중고제의 마지막 창자라는 상징성이 있다.
김세종에게 짜임새 있게 판소리를 배웠고, 성량이 풍부하고 풍채가 당당해 거인적인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1900년 고종 황제의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렀고 고종은 그를 특히 아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계를 내렸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했다. 1902년 서울로 올라온 이후 근 40년간을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동백은 후진들을 위해 은퇴하고 낙향한다. 이후 처가인 평택시 칠원동 새말에 집을 장만하고 말년을 지냈으며 해방 후 간간히 무대에 서기도 했지만 평택농악을 재현하고 후학을 육성하는 일에 힘쓰다가 1950년 6월 6일 85세에 타계했다. 죽기 직전까지 날마다 북통을 지고 새말 뒷산에 올라가서 소리를 했으며 죽기 직전에 “이제 겨우 소리를 알만하니 죽을 때가 됐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한평생을 바치고도 판소리 예술의 넓고 깊은 세계에 끝내 이르지 못한 아쉬움의 표현이며 높은 예술적 성취에 이르렀으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는 이동백의 구도자적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이동백은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다. 특히 ‘새타령’을 잘했는데 그의 ‘새타령’은 이날치李捺致·박유전朴裕全 이후 첫손으로 꼽고 있다. 그의 소리를 담은 음반이 수십 종 남아 있으며 특히 ‘새타령’과 ‘흥보가’ 중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 ‘심청가’ 중 범피중류泛彼中流 대목이 걸작으로 꼽힌다.
이동백은 20세기 전반기 가장 큰 인기를 누리면서 수많은 음반 녹음을 남겨 후세에 판소리를 풍부하게 들려주고 있다. 말년에 10여년을 거주한 평택지역에서 그의 예술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계승하는 움직임이 있다.



 

| 근대 5명창 이동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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