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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영희池瑛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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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졸 년 : 1909∼1979년

활동분야 : 기악가·국악교육자 /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

출 생 지 : 포승읍 내기리 543


지영희의 본명은 지천만池千萬으로 해금 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이며 악기·소리·춤 등에 두루 능했다. 경기도당굿의 대가이며 기악가이자 교육자·지휘가·영화음악가 등 민속음악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경기지방의 무속 가락을 근간으로 한 그의 음악은 ‘지영희류 해금산조’와 ‘경기 대풍류’로 후학들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73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으며, 그의 아내 성금연成錦鳶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다.
지영희는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에서 태어나 1929년 조항련 선생의 문하에서 호적·피리를 배웠다. 다양한 악기는 물론 소리와 춤에도 능했다. 장사훈·성경린·김준현·이덕환·성금연 등과 함께 1941년 서울중앙방송국 소속 연주단체인 ‘조선음악회’를 창설해 라디오 전파를 통해 기악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53년 대한국악원 산하 ‘지영희고전음악연구소’를 창설해 기악과 고전무용을 지도했다. 1964년 박헌봉·유기룡과 함께 자신이 교사로 근무했던 국악예술학교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을 창립했고 1966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세워 초대 상임지휘자로 활약했다.
평생 연주자이자 교육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며 국악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10세 때부터 승무·검무 등 여러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세부터는 호적과 양금·단소·퉁소를 배우고, 23세부터는 지용구에게서 해금·풍류시나위를 전수받았다. 양경원에게 피리 삼현육각과 시나위, 같은 평택 출신 방용현에게 대금을 배웠다. 대금 시나위·무악장단·경 기 소리·서도 소리를 전수받기도 했다. 여러 대가들에게 전수 받은 다양한 분야의 능력을 토대로 국악예술학교 교사·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초대 지휘자로 재직하며 연주 활동과 함께 후학들을 배출했다. 제자로는 중앙대학교 총장을 지낸 박범훈, 중앙대 최태현 교수와 사물놀이 명인 김덕수 등이 있다.
연주하지 못하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여러 악기에 두루 능통했던 ‘한국음악의 선각자’ 지영희 예술세계의 자취는 ‘지영희류 해금산조’와 ‘경기 대풍류’로 전해지고 있다. 민속 기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산조는 작곡자와 연주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던 시절에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집대성해 가락을 짠 뒤 본인의 이름을 붙여 연주했다.
‘지영희류 해금산조’는 20세기 초반에 지용구 명인이 처음 연주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 지영희·한범수가 해금산조의 골격을 완성했다. 현재 많은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지영희류 해금산조’는 섬세하고 굴곡이 많으며 경기민요처럼 가볍고 경쾌하면서 익살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대풍류’라고 알려진 관악기 중심의 멋스러운 합주곡 ‘경기대풍류’는 서울·경기지역 민간 음악인들이 전승해 온 합주곡으로, 염불(느린염불-반염불)·타령(허튼타령-중허튼타 령-자진허튼타령)·굿거리(굿거리, 자진굿거리)·당악 등으로 이루어진 곡이다. 현재 국립국악원 등에서 연주하는 대풍류는 1960년대 지영희 명인이 구성한 것이다.



 

| 국악 현대화의 선각자 지영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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