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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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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팽성읍 함정 1리(서원말)



포의서원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맺은 화친조약 때 척화를 주장해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잡혀가 처형된 삼학사 홍익한(1586~1637), 윤집(1606~1637), 오달제(1609~1637)를 배향한 사액서원으로 ‘포충사우’, ‘평택사우’ 등으로 불렸다. 사당은 삼학사와 우남양을 배향했던 ‘남양사우’로 있다가 ‘포의사褒義祠’가 사액받게 되자 ‘향현사’ 로 된다.



| 함정리 전경 |



[ 설립과 연혁 ]


•홍익한은 1653년(효종 4) 도승지에 추증됐다. 유생 김간의 발의로 1661년(현종 2) 홍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삼학사와 우 남양의 남양사우南陽祠宇를 서면 경정리에 세웠다.

•1679년(숙종 5) 시작해 1681년(숙종 7) 완공하여 삼학사를 배향했다.

•유림들의 상소로 1686년(숙종 11) 홍익한에게 공조판서와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93년(숙종 19) 영의정에 추증됐다.

•유생 허호의 상소로 1704년(숙종 30)에 ‘포의사褒義祠1)’로 사액됐다.
     1717년(숙종 43) 임금이 관리를 파견해 치제하고, 직접 삼학사를 애도하는 시를 내렸다.

•홍양묵(1764~ ?)이 화성판관일 때 포의사를 중수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향사 철폐령書院鄕祀 撤廢令’에 의해 1871년(고종 8) 훼철됐다.2)

•일제시대 남산리 송화리 쪽에 대규모 군수물자 저장 지하벙커를 만들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방공호를 팠다.
     이 방공호는 선말 반대편과 맞뚫다가 가운데가 무너졌다.

•현재는 미군 비행장이 들어섰고, 서원마을 (속칭 ‘선말’)이라는 이름만 있다.



[ 위치와 규모 ]


포의서원은 평택현 서쪽 10리 되는 지점인 경정리에 있었다. 함정촌(함등촌)과 경정리가 합해 함정리咸井里가 됐고 함정 1리(서원말)와 함정 2리(말랭이)로 나뉘었다. 경정리는 ‘등 같은 고래가 나타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광여도』의 평택현을 보면 ‘褒義洞’ 과 ‘書院’이 표기 돼 있는데 ‘포의동서원褒義洞書院’은 본정 2리 아리랑고 개 사거리에서 오른쪽 함정 1리(서원말)에 있는 ‘슨말산(서원말산)’이며, 말랭이는 ‘산등성마루’의 준말인 ‘마루’의 방언으로 서원말산등성마루에 있었다. 포의서원의 공간구성과 배치는 교육시설인 재실齋室·강당講堂·제향시설인 사당이 있었다.
사당은 6간 규모로 ‘포의사’라는 현판을 달았다. 처음에는 삼학사와 우 남양을 모신 남양사우南陽祠宇로 배향하다가 별도로 ‘포의사褒義祠3)’가 사액된 후 포의사에는 삼학사만을 배향한다. 앞에는 송시열이 지은 묘갈이 있었다. 옆에는 홍익한의 유허지가 있고 서쪽으로 앞쪽에 바다와 절벽이 있었다. 남쪽으로 몇 백보 되는 지점 서로 바라 보이는 곳에 홍익한의 묘가 있었다.
재실齋室·강당講堂에 원생 수는 20명 정도였고, 강당은 8칸 규모로 서원 안에서 제일 컸으며, 넓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이 있었다. 강당 앞에 오른 쪽의 동재와 왼쪽의 서재가 6칸 있었다.
서원전 중 3결에 한해 면세했고 군역대상자를 끌어들여 피역시키는 대신 돈을 징수하는 오입수를 20명까지 둘 수 있었으며 사액 시 지급된 노비가 7명이었다.



 

| 고지도 속의 포의서원 |



주석

1) 평택(平澤) 포충사우(褒忠祠宇) 신축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했다.
      :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2) 1872년(고종 9)제작된 「평택현 지도」에 “褒義祠 毁基 自官文十里”라는 기록이 있다.
3) 평택(平澤) 포충사우(褒忠祠宇) 신축년에 세웠고 갑신년에 사액했다. :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