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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정씨 일가 효열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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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정씨 일가 효열정문海州鄭氏 一家 孝烈旌門



소 재 지 : 팽성읍 근내리(근내골)



•현황 : 정하교 효자정문과 경주김씨, 진주강씨의 열녀 정문이 함께 모셔져 있다. 대지 660㎡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6.6㎡ 규모로 지붕은 한식의 골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으로 옆면은 방풍널을 달고 있다. 정문 안에는 정하교, 경주김씨, 진주강씨 편액과 ‘증동몽교관정공정려기’와 ‘경주김씨 정려기’가 있다. 정면에는 홍살을 설치했고 측면과 배면은 벽을 쌓았다. 사각뿔대 기초석 위에 목조원형기둥으로 겹처마 형식, 정문 뒷편에 노송 7그루가 있었다.


•행적 : 정하교鄭河敎(1802~1861)는 정광의鄭光義의 맏아들로 본관이 해주, 자는 백륜伯崙이며 근내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소학 읽기를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아버지가 위급하게 되자 곁을 떠나지 않고 온 힘을 기울여 병구완을 했다. 춥고 눈 쌓인 겨울날 병석에 누운 아버지께서 물고기를 잡수시고 싶다해, 얼음 위에서 물고기를 잡아 아버지께 드려 완쾌돼 7년을 더 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묘소의 여막에서 3년 상을 치렀고, 20년간 상식을 올리는 효행으로 해주 정씨 종중과 유림의 칭송을 받아 1892년(고종 29)에 정표됐다.
정문 옆에 ‘증동몽교관 정공정려기’가 있다. 해주정씨 족보의 효행록 편에 있는 글은 고종 때 공조판서·겸경연관인 최익현崔益鉉이 찬한 것이다.





•행적 : 경주김씨慶州 金氏는 정하교의 아들 정필석과 혼인했다. 항상 효행을 실천했고, 여자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일관했다. 남편이 병들어 위급하게 되자 스스로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어 살리려고 정성을 다했으나, 남편이 죽자 칠성七星께 기도하고 따라 죽으려 했으나 시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으로 죽음을 포기했다. 이 후 집안을 일으키고 자식 교육을 잘해 집안을 번성케 했다.
행실이 서울에 알려져 1906년 정표됐다. 정표 옆에는 ‘경주김씨정려기慶州金氏旌閭記’가 함께 걸려 있다.





•행적 : 진주강씨晉州 姜氏는 통정대부 강원영의 딸로서 정태선鄭泰瑄과 결혼했다. 성품이 곧고 청렴하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동기간의 우애가 두터웠다. 결혼 후에도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을 섬기고 공경했다. 을미년 정월 초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비통함이 하늘에 닿았으나 슬픔을 억제하고 슬하의 어린 자녀를 정성으로 가르쳤고, 큰아들 정안근과 함께 어려운 가세를 키워나갔다. 집안이 번성하게 될 만해지자 큰 아들이 죽었으나, 시어머니와 며느리 권씨 등 여자들이 힘을 합해 다시 집안을 일으켰다. 시어머니 경주 김씨와 며느리 진주 강씨의 2대에 걸친 열녀 행실이 정씨 가문 <동종효행록>에 담겨 있고 1968년 정문이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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