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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성김씨 일가 효열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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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일가 효열정문義城金氏 一家 孝烈旌門



소 재 지 : 고덕면 당현리



•현황 : 의성김씨 일가 효열 정문義城 金氏 一家 孝烈旌門은 김치복金致福과 그의 며느리 황씨, 손부孫婦 조씨, 증손부 권씨 등이 4대에 걸쳐 한 가문에서 효자·열녀·효부의 정려를 받은 것으로 고덕면 당현리에 위치한다. 원래 서탄면 적봉리에 세웠으나 오산 미공군기지로 철거돼 용인시 남사면 완장리에 재건축 봉안돼 있다가 2001년 고덕면 당현리 지역으로 정문을 다시 옮겨지었다.
정문은 정면 2칸, 측면 1칸 크기로 초석윗면을 다듬어서 모든 초석면을 동일 수평선상에 놓고 가공을 정교하게 다듬은 둥근 초석위에 두리기둥을 사용해 2익공 목조형식의 맞배지붕으로 한식기와를 얹었다. 맞배지붕 양옆에는 방풍널을 달았다. 정면에는 홍살문을 달았고 창방과 도리에는 부재의 끝머리에만 간단한 문양을 넣고 중간은 긋기만을 해 가칠한 상태로 그냥 두는 모로단청을 했으며, 둥근 처마 서까래에 위에 부연을 달아 처마를 연장시켜 머리초를 했다.



| 의성김씨 일가 효열 정문 |



•행적 : 김치복金致福(1675~1750)은 본관은 의성, 자는 수지綏之, 호는 졸암拙庵이며 아버지는 용재龍在이다. 서탄면 적봉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병으로 고생할 때 백방으로 영약을 구해 반드시 먼저 맛을 본 후에 올렸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자 하늘에 자신이 아버지의 병을 대신하도록 기원했고, 탁발승으로 하여금 비방을 전하게 했다. 15세 된 남자아이의 머리를 먹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자식을 희생시킬 것을 결심해 서당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고개 마루에서 기다렸다가 비수로 찌른 후 목을 베어 가마솥에 넣고 끓였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아이는 사라지고 커다란 산삼 뿌리가 있어 이를 부친에게 바쳐 효험을 보았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3년간 여묘하고 상을 마친 후에도 아침·저녁으로 성묘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4)·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소문이 세상에 퍼져 향교에서 효천장을 올려 1831년(순조 11)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행적 : 김수로의 처 황씨黃氏는 조선후기 열녀로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1716년(숙종 42)에 태어났다. 통덕랑을 지낸 의성김씨 김수로金洙老(1716~?)와 혼인했으며, 남편이 죽은 후 쌀 한 톨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다가 7일 만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 열녀로서의 행실이 조정에 전해져 1831년(순조 31)에 정문이 내려졌다.





•행적 : 김달명의 처 조씨趙氏(1737~?)는 조선후기 효부로 본관은 양주이다. 동몽교관으로 추증된 의성 김씨 김달명金達命과 혼인했으며, 남편과 더불어 시부모를 모시는데 지 극한 효성과 정성을 다해 봉양했고, 시부모님 상을 당한 후 3년 동안에도 맛있는 것을 입에 넣지 않고 소식素食을 했다. 뒤에 그녀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852년(철종 3)에 정려 받았다.





• 행적 : 김유성의 처 권씨는 조선후기 효부로 본관은 안동이며 통덕랑通德郞5) 권재응權載應의 딸이다. 동몽교관으로 추증된 의성김씨 김유성金維城과 혼인하고 시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자 남편과 더불어 3일간 기도했는데 눈 속에 송이가 보였고 꿩 새끼가 집으로 날아왔으며 배 3개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등 신의 도움으로 병환이 나았다. 효행이 알려져 1860년(철종 11)정려를 받았다. 권씨를 영인令人으로 제수하는 교지가 남아 있다.



| 안동권씨 효부정문정표 |





주석

4) 통정대부(通政大夫) : 조선 때 문관(文官)
5) 통덕랑(通德郞) : 조선시대 정5품의 동반(東班 : 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