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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세 충효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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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도일동 안골마을



•현황 : 양세 충효정문은 조선 명종~광해군시대에 무관인 원연과 원사립 부자의 충성과 효성을 받들기 위해 만든 것이다. 1800년대 원길상 효자정려문이 낡아 양세충효정문에옮겨 놓았다. 정문 안에 묘갈명 현판이 있고 제액題額은 ‘贈通政大夫 吏曹參議 行績城縣監 元公墓碣銘竝書’라고 적혀 있다.



| 양세 충효정문 |




•행적 : 원연(1543∼?)은 문신으로 자는 광보廣甫, 시호는 충절忠節, 준량의 차남이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3등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사재를 모아 진위현의 의병을 모았고, 용인의 김량장리에서 왜적과 맞서 승리해 경기좌도로 침범을 못하게 했다. 임진왜란 후 연기현감, 이후 적성현감 겸 양주진관병마절제도위로 임명됐으나 관찰사와 의견이 맞지않아 낙향했다. 증직으로 이조참의에 봉해졌고 1679년 충절인으로 정려됐다.





•행적 : 원사립元士立(1569∼1610)은 자는 현경顯卿, 원연의 차남이며 원연의 동생인 원전에게 양자 입적했다. 1597년 원사립의 부친 원전이 경상도 수군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해 부친상을 당했으나 호남지방에 출몰하는 왜적을 토벌하러 나가게 됐다. 서천군수로 임용돼 지용智勇으로 호남지방에서 왜적을 몰아내어 진주목사로 승진했다. 김해부사를 거쳐 통정대부에 오르고 만포방어사와 평안도 병마절제사를 지낸 뒤 낙향해 부친상을 지내며 3년간 시묘했다. 1829년 진위 유림의 요청으로 1829년 7월 효자정려를 받았다.





•행적 : 원길상元吉常(1759~1818)은 효성이 지극해 13세에 모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시게 했으며 3년간 시묘했다. 계모를 극진히 모시고 향리 어른들에게 예의를 다했다. 진위 유림이 조정에 효자정려를 청해 1894년(고종 31)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고 효자정문을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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