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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유물>교통 · 통신유적>육로교통의 역사>삼국시대 육로교통
■ 삼국시대 육로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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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지역은 고대부터 육로 및 수로교통이 발달한 지역이다. 삼한시대에는 평택과 가까운 직산에 마한의 목지국이 존재했고, 백제 초기의 중심도 천안시 성거읍 일대6)로 비정하는 학설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직산은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서거정의 글에도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 뒤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다.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公州요, 또 사비하泗悱河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라고 기록했다. 5세기 후반 고구려는 직산을 점령하고 사산성을 축성했으며, 신라 때에는 사산현이라 부르고 한강유역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이 시기의 교통로는 추풍령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추풍령로는 경상북도 상주에서 보은·청주·진천·직산을 거쳐 당항성으로 이어진 교 통로다.7) 당항성을 기존의 의견대로 화성시 서신면의 당성과 당은포라고 했을 때 신라의 대중국 교통로가 평택지역을 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당시 직산에서 당항성까지의 교통로는 어떻게 형성됐을까? 사료는 없지만 팽성 읍과 서평택 일대의 지역교통망과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직산-성환-팽성 읍 객사리-팽성읍 노양1리(경양포)-현덕면 신왕1리(신흥포)-덕목리-황산리-포승읍 방 림리-도곡리-원정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노정路程은 능선으로 형성돼 근대 이전 서 평택지역의 복잡한 해안선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며, 신흥포에서 남양만까지 최단 거리라는 장점이 있었다. 이 구간은 661년 신라의 고승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항성에서 배 를 타고 도당유학을 가기위해 포승읍 원정리 수도사 근처의 토굴에서 잠을 자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견성오도見性悟道8)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시대에는 당항성으로 이어지는 대 중국 교통로와 함께 삼남대로도 주요 교통로였다. 그것은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을 빼앗긴 백제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천도 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웅진천도는 차령과 금강이라는 천혜의 요새와 함께 천안-공 주-전주로 이어지는 교통로도 중요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주석

6)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7) 단국대학교매장문화연구소, 『평택 원효대사 오도성지 학술조사보고서』,
매장문화연구소 학술조사총서 제40책,2006.
8) 단국대학교매장문화연구소, 위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