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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신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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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이전의 통신수단은 봉수烽燧·파발擺撥·보발步撥이 있었다. 봉수는 서울 남산에 위치한 한양 목멱산봉수를 중심으로 불과 연기로 군사상의 위급상황을 중앙에 알리는 통신수단이었고, 파발이나 보발은 사람이 직접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봉수제를 정비했지만 보완책으로 1583년 보발步撥, 1592년 이원익의 건의에 따라 기발騎撥이 실시됐다. 파발은 왜란 중에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를 보고 한준겸이 건의해 1597년부터 실시됐다. 파발은 외침이 많았던 평안도나 함경도 그리고 경상도에만 설치했고, 외침에서 비교적 안전한 충청도와 전라도는 보발로 대체했다.
봉수烽燧는 봉(횃불)과 수(연기)로 군사적으로 위급한 상황을 신속히 중앙에 전달했던 근대 이전의 통신방법이다. 전달방식은 야화주연夜火晝煙이라 하여 밤에는 불빛을 낮에는 연기로 연락을 취했다. 봉수烽燧는 낭화狼火 또는 낭연浪煙이라고도 했다. 불을 피울 때 땔나무에 이리의 똥을 섞어 만들어진 용어다. 조선은 건국 후 통치체제 확립과 국방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세종 연간에는 남쪽으로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토벌했고 북쪽으로 여진족을 토벌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조선시대 봉수제도는 세종 때 북방개척과 함께 확립됐다. 그 후 15세기 후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완성으로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졌다. 시설미비, 불충분한 인원배치, 봉수군에 대한 보급부족, 봉수군의 근무태만과 도망으로 인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문제점이 많았다. 정작 중요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에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도 했다. 1605년(선조 38)에는 파발제를 실시했지만 문제점이 드러나 숙종 이후에는 봉수烽燧와 병행해 운영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됐다.58) 조선시대 봉수체계는 경봉수京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로 나누었고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으로도 구분됐다. 전국의 봉수망은 한양의 목멱산(남산) 경봉수를 중심으로 함경도 경흥, 부산의 동래, 평안도 강계, 평안도 의주, 전라도 순천 등 다섯 개의 노선을 갖고 있었다. 이 가운데 경흥(제1로), 강계(제3로), 의주(제4로)는 몽고·여진·중국 등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해 정비된 것이었고, 동래(제2로), 순천(제5로) 노선은 일본 등 해양세력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평택지역에는 연변봉수 제5횃불의 경로였던 팽성읍 신대리의 망해산봉수와 포승읍 원정2리 괴태길곶봉수가 설치됐다. 두 개의 봉수는 순천 방답진에서 한양의 목멱산까지 연결됐던 제5횃불第五炬의 직봉과 서천·보령·당진을 거쳐 괴태길곶봉수에서 만나는 간봉이 합쳐지는 통신상의 중요한 요지였다.








+ 괴태길곶봉수烽燧

+ 망해산봉수

주석

58) 김주홍, 『조선시대 봉수연구』, 서경문화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