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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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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두징과 의령남씨 묘역


소 재 지 : 고덕면 당현1리 산16-2



•현황 : 의령남씨 묘역에는 남두징을 비롯해 남명하·남성유·남성재·남제언·남택신·남득신·남유충의 8기의 묘가 있는데 최근 확장 조성됐다. 남두징南斗徵은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천서天瑞이다. 1662년(현종 3) 진사시에서 글을 지었는데 시험관인 유시兪市와 남계南棨가 문장을 보고 우두머리에 두면서 말하기를 “남생南生이 지은 것은 초사楚辭이다. 우리들이 감히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라며 크게 칭찬했다. 관직은 선릉참봉·연원찰방連原察訪·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공조좌랑工曹佐郞·고령현감高靈縣監·장례원사평掌隸院司評·개령현감開寧縣監·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사직서령社稷署令·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 등을 지냈다. 벼슬을 그만두고 시를 읊조리며 지냈고 자산을 늘리지 않아 집 주변이 늘 소연蕭然했다. 고을의 수령이 돼서는 한결같이 나라의 법전대로 따랐으므로 지방의 힘 있는 자들이 불편해하며 많이 동요했으나 봐주지 않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및 친척들과 함께 잘 지내어 세상에서 ‘효우지가孝友之家’라고 칭송했다. 문집으로 『지천산록枝川散錄』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14세 손 남두징은 전주이씨 첨추 효승의 딸과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과 막내딸은 일찍 죽고 백씨인 서윤공의 둘째아들 15세손인 남명하가 후사를 이었다. 남명하는 남두징이 1690년(숙종 16)에 죽자 김포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묘를 이전하면서 시묘를 위해 솔가해 당현리에 입향했다. 이후 의령남씨가 270여 년을 거치면서 원당현과 하막금에 많이 분포하게 됐다. 남명하의 아들로 16세손인 남성유와 남성재, 17세손인 남제언, 18세손인 남택신, 남득신 19세손인 남유충 8명이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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