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순택 신도비沈舜澤 神道碑 > 유적과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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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순택 신도비沈舜澤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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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진위면 봉남리 동부마을



심순택(1824~1906)은 26세인 1850년(철종 1) 홍문관 교리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가 을 사늑약으로 국권을 잃은 이듬해인 1906년 사망하기까지 열강의 침탈에 시달리던 시기에 중책을 맡았던 인물이다. 품성이 ‘너그럽고 묵직했으며 평생 새롭고 기이한 것이나 고원高 遠한 논의를 하지 않았다’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당대의 개혁 사상인 개화사상을 적극적 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충성스러운 관료였다. 그가 홍문관, 예조, 이조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영의정까지 올랐던 것은 당대 인정받는 학자였으며 국왕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의 미한다.
격동의 시기에 그는 동도서기론적인 입장에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갑신정변 때는 우 의정으로 있으면서 급진 개화파의 개혁에 반대해 청군의 출병을 요청했다. 또한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영의정으로서 농민군을 막는데 노력했지만 한계를 느끼자 청나라에 원군 파병을 요청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을미사변(1895)과 아관파천(1896) 후에도 의 정부 의정議政으로서 대한제국 성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근왕주의勤王主義적 성 격이 강해 근대적인 개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윤용선, 조병식 등과 함께 독립협회로부터 규탄 받아 관직에서 해임됐으나 곧 복직돼 을사조약(1905) 때까지 관직생활을 했다. 고종의 두터운 신임과 왕실에 대한 충성으로 1902년 청녕공靑寧公에 봉 해졌다. 을사조약 후 조병세 등이 자결하자 심순택도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자 했으나, 왕 의 만류로 시행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병을 앓다가 1906년 83세로 사망했다.
그가 죽은 지 2년 뒤인 1908년(융희 2) 그의 무덤 동남쪽에 신도비를 세웠다. 비석의 글 은 규장각 대제학 김학진이 짓고, 글씨는 민병석이 썼으며 두전頭篆은 의정부참정 김성근 이 썼다. 비석의 총 높이는 289cm, 비신의 높이 178cm, 폭 66cm이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