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필 신도비李世弼 神道碑 > 유적과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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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필 신도비李世弼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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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진위면 봉남3리(아곡)



이세필(1642∼1718)은 이항복의 증손이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외조부다. 신도비는 이세필의 묘역에서 남쪽으로 2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비신碑身의 높이는 210cm, 넓이 98cm, 두께 39cm다. 비문의 내용에 기록된 이세필의 행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향시鄕試에는 누차 합격했으나 문과시험에는 번번이 실패해 고향에 은거하고 있던 중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 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 당하자, 송시열과는 모르는 사이였지만 그를 적극 옹호하다가 영광에 유배됐다. 유배지에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집 밖이라곤 내다보지도 않았다. 이 기간 동안 ‘퇴계집’을 읽으며 학문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1678년(숙종 4) 귀양에서 풀려나 고 이듬해 학행으로 천거돼 1679년 창릉참봉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동몽 교관童蒙敎官이 됐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龍安현감이 됐다. 용안현감 재직 시에는 교육을 중요시해 소학과 대학을 매일 가르쳤다. 이후 진위현령과 삭녕군수를 거쳐 사복시 정司僕侍正, 장악원정掌樂院正, 서연관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가선대부로 승진해 한성 부윤, 공조참판을 제수 받았다. 70세가 돼도 총기를 잃지 않고 어깨와 등이 꼿꼿해 피곤한 빛이 없었다. 77세를 일기로 임종한 날 밤에 흰 기운이 침실에서 일어나 빛나고 밝기가 불 빛과 같았다.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됐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세필의 학문하는 태도는 정밀하게 생각하고 실천함을 급선무로 삼았다. 이치로서 궁구 할 수 있는 것은 정밀과 근본과 말단을 가지고 머리부터 연구했다. 만년에는 예학에 몰두 했다. 무릇 경례經禮와 곡례曲禮, 의례儀禮로부터 송, 명 및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서 로 대조해 교정했다. 사서오경四書五經 뿐만 아니라 중국과 우리나라의 예학에 관련된 서적 들을 두루 탐독했다. 그러면서도 학문적으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할 것을 강조했다. 비문은 이세필의 집안과 혼인관계가 있었던 이조판서 이덕수李德壽가 이세필을 평소 사 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썼다. 『영조실록』에 실린 이덕수의 졸기에 의하면 그는 인품이 순근醇謹하고 정성스러우며 꾸밈이 없었다고 한다. 부음을 듣고 임금이 슬픈 마음이 간절 하다는 애도의 표시를 했다. 성균관 대사성 조명교曹命敎가 전액篆額하고 좌의정 서명균徐 命均이 글씨를 썼다. 비문은 숭정崇禎 기원 후 재 신유년辛酉年인 1741년(영조 17)에 쓰였 다. 비석 오른쪽 측면에 이세필의 6대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을축년乙丑年에 쓴 글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현재의 신도비는 1865년(고종 2)에 세 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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