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 신도비張羽 神道碑 > 유적과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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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우 신도비張羽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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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팽성읍 노양1리(계양)



장우는 고려 말에 예부의랑禮部議郞4)을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 1396년(태조 5)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관직은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후에 명재상이 됐던 황희와 함께 법률을 정하고 예악을 흥성시켰다. 그의 묘가 노양리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여러 차례 전재의 화를 겪으면서 거의 유실한 것을 15세 종손인 장현근張顯根이 직계 및 방계傍系 조상의 묘와 수호물을 찾아냈으며 후에 신도비를 건립했다.
신도비는 1920년 10월에 다시 세웠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전의 신도비를 고쳐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 17세손으로 규장각직학사를 지낸 장세기張世基가 글을 짓고, 18세손 장익진張翼鎭이 글씨를 썼으며, 19세손 장순규張淳奎가 전액했다. 비신碑身의 높이 140cm, 넓이 51cm, 두께 22cm이다.



주석

4) 고려 후기 제향, 학교 사대, 의례 등을 담당하는 관청의 정4품 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