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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유물>불교유적>심복사深福寺>창건과 내력
■ 창건과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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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복사의 원래 이름은 ‘신복사新福寺’였다. 이점은 1936년의 중수기에서도 확인될 뿐만 아니라 영조연간에 편찬된 『여지도서』, 1792년에 편찬된 『수원부읍지』, 1899년의 『수원군 읍지』 등 조선시대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11년 일제의 사찰령寺刹令에 의해 초대 주지인 황경운도 신복사 주지로 취임했다. 그러나 이후 어느 시점에서 ‘심복사’로 부르게 됐는데 이유는 상세히 알려지지 않는다.
심복사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1936년 중수하면서 발견된 기와에 있는 ‘1575년(만력萬曆 3) 3월’이라는 명문이다. 이후 중수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창건 연대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1936년 정우흥이 심복사의 창건 및 중건 내용을 기록한 현액이 법당 내에 걸려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고 내용만 전해진다. 여기에 ‘어부인 문씨, 천씨, 박씨 세 노인이 어느 날 바다에서 그물로 돌로 된 부처님을 건져 올려 부처님이 신복으로 가라는 꿈에 따라 지금의 자리에 옮기고 신복사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심복사 대적광전의 주존불인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양식상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당시 이 같은 규모의 불상을 제작하고 사찰을 세우려면 결코 적지 않은 기술력과 경 제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고등산 주변에 기름진 농토가 많지만 바닷가 간척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없는 곳이었다. 따라서 심복사석조비로나자불좌상 의 조성에 중앙정부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복사 앞 바다는 통일신라시기에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을 오가거나 화물을 운반하는 길을 보호하고 안전을 기원하는 사찰 건립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심복사의 창건 역시 이 무렵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대적광전의 주존불이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 불상을 모신 사찰도 같은 시기에 창건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후 조선 초기까지 기록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어느 시점에 폐사됐을 것이다. 설화의 내용에서 폐사된 절이 중건됐을 것이라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기록상 중창에 관한 최초의 연대는 1936년 중건 불사 때 발견된 기와의 ‘만력萬曆 3년(1575년·선조 8) 3월’이다. 또한 내원당 앞 석주에 ‘강희康熙 44년(1705년·선조 31) 3월’의 명문이 있어서 이때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767년(영조 43), 1856년(철종 7), 1875년(고종 12), 1936년에 계속해서 중건이 이뤄졌다. 1990년에는 대적광전을 중건했고, 1992년에는 법당 안마당을 확장하는 등 시설을 확장했으며 1992년 후불탱화와 신중탱화를 봉안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 절이 최초로 건립됐을 당시에는 대당 교역로와 관련된 성격이 강했지만 이후에는 많은 변화를 보였을 것이다. 사찰 주변이 어업 발달지역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산만은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까지 천혜의 어장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산만에서 붕어·게·숭어·웅어 등이 많이 잡힌다고 기록돼 있다. 해마다 봄, 가을 성어기成漁期가 되면 인근 고기잡이배들이 몰려들 정도였다. 불상을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는 것과 중심 인물들이 뱃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는 어부들의 수고와 노력이 이 절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조선시대에는 심복사가 뱃사람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예배처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 심복사 탱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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