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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건과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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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는 852년(신라 문성왕 14)에 가지산파의 개조인 도의선사의 제자 염거廉居(?∼844)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다만 염거가 창건했다면 844년 이전으로 봐야 한다.
구전에 의하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견디지 못하고 불에 탔다는 설도 있고, 남양만 일대가 해적 소굴이 되면서 약탈과 승려 납치에 못 이겨 폐사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한 고려말기에 크게 쇠퇴한 후 조선 초 산사태로 폐사됐다고도 한다.
원래의 수도사가 있던 곳으로 지목되는 곳 중 하나인 ‘포승읍 원정리 83번지’에는 현재 LNG기지가 들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에는 이 곳이 약 300평 규모의 절터에 수령 900년쯤 되는 느티나무 한 그루와 오래된 맷돌이 하나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밝히고 있어 절의 창건 시기와 규모를 대략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006년 실시된 지표조사에서는 LNG 기지에서 고려·조선시대 유물들이 수습됐다.
폐사됐던 수도사가 다시 중창된 것은 조선후기다. 중창된 곳은 본래의 절터가 아닌 괴태산(봉화재) 중턱이었다. 1872년 지방도에는 수도사가 괴태산 남쪽에 표시돼 있고 양성현 지도에는 괴태봉수 아래 승량동면에 수도사가 위치한 것으로 표시됐다. 이로보아 조선후기에 처음과는 다른 지역에 수도사가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수도사 안내책자에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곧 복원했으나 1911년 화재로 폐사됐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수도사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1757년(영조 33)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여기에는 “괴태槐台 봉수 아래에 있다”고 기록돼 있으며 명칭도 ‘수도사’가 아닌 ‘수도암修道庵’으로 표현돼 절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1999)이나 「평택 원효대사 오도성지 학술 조사 보고서」에는 지금의 한국가스공사 LNG 기지 안에 있었다고 하지만 봉수대 또는 해군 제2사령부가 있는 곳으로 전하는 마을사람도 있다. 두 곳 모두 옛날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 양성현 지도에 기록된 수도사 |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