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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유물>불교유적>서천사曙天寺>창건과 내력
■ 창건과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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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건과 변화




절에 있는 기록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공민왕 1년(1352)에 나옹화상이 창건했다. 조선이 건국된 1392년 태조가 순국한 군인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사명대사가 승병 1,500여 명2)을 배치하고 왜적의 서해안 침투에 대비해 46일간 머물며 방축리 북쪽의 성두, 울성리 서천사 주변에 절을 짓고 토성을 쌓았다. 그러나 왜군이 이곳으로 침입하지 않아 전투 없이 머물다가 경상도 김해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나머지 절은 점차 쇠하고 서천사만 남았다고 한다.
인조 때 화재로 사찰이 전소됐다가3) 1870년 동파4) 스님이 땅속에 매몰됐던 미륵불상을 발견해 초암草庵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5) 이후 1929년에 중창됐으나 1953년 화재로 1954년 법당을 다시 지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건 당시 절 이름이 서천사였는지는 분명치 않고 현 서천사에서 구전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소규모 절로 ‘소시랑굴 절’, ‘열 우물’ 절로 통하다가 일제 강점기 평산스님이 ‘수덕암’이라고 했는데 최근에 서천사로 변경했다.



주석

2) 평택문화원·고덕면지편찬위원회, 『고덕면지』, (2007)에 5,000명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3) 『평택의 역사와 문화유적』, 『평택시사』 등에는 1623년 인조반정 때 지방에서 일어난 소요 때문이라고 쓰여 있으나 인조반정 때는 지방에서 큰 소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1624년 이괄의 난이나 1724년 이인좌의 난일 가능성이 크다. 인근에 이괄의 묘가 있다는 구전 등을 볼 때 이곳에 이괄과 내응하는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방축3리 유신동에 소씨들이 살았다 해서 소시랑골이라 불렸는데, 이인좌의 난 때 평택지역의 소씨들이 가담해 멸문되기도 했다.
4) ‘석동파’라고도 불렸다.
5) 2001년 편찬된 『평택시사』에는 미륵불이 원래 서천사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성두리 절로 옮겼다가 그 절에 빈대가 많아서다시 서천사로 옮긴 것으로 쓰여 있으나 현재 서천사의 관계자에 의하면 성두리 쪽 절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어느 설이 맞는지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