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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건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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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화가 구전된다. “1600년 전 신라 내물왕 때에 한나라 낙양 말에 고승과 명사들이 배를 타고 노닐다가 태풍을 만나 큰 바다로 표류해 아산만에 도착했다. 귀국길이 막연해 산수가 수려한 명승지를 찾아 헤매다가 이곳에 절을 창건하고, 고국인 한나라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망한사로 부르게 됐다. 그 후 언젠가 폐사가 됐는데 마을사람들이 다시 절을 세우고 수령에게 이름을 지어 달라 하자 망자와 한자의 위치를 바꾸어 한망사漢望寺로 했다가 자비사慈悲寺로 부르게 됐다”
그러나 한나라는 220년에 망하고 내물왕은 4세기 후반에 재위했던 점을 감안하면 구전설화는 전혀 신빙성이 없으므로 절이 언제 처음 건립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자비사라는 절의 명칭도 1970년대 중반에 등장했기 때문에 구전 설화를 근거로 창건연대를 높여 잡기에는 한계가 있다. 경기도박물관의 조사 결과 조선시대 기와편과 백자편만 수습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에 창건됐다는 증거를 아직까지 찾기 어렵다. 단지 평택지역은 서해안과 가까운 물길이 발달했기 때문에 구전설화 내용과 같이 망한사 창건의 주체가 중국인일 가능성은 있으나 시기가 언제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망한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세기 후반 신치에 의해 편찬된 『팽성지彭城誌』의 불우佛宇조이다.



“망한사는 객사 동쪽 1리쯤에 있는데 옛날에는 아주 큰 절로서 평야 가운데 있었다. 그때는 관속官屬들도 번화하고 풍성했을 뿐 아니라 읍내 사람들이 모두 부유했다. 그런데 이 절이 퇴락한 뒤로부터 관례官隷나 이속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약간 남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한결같이 빈한해 독립해 가계를 이루어 나가지 못하고 있다. 지사地師들의 말에 의하면 이 절은 관가의 수구水口인데, 이 고을 사람들이 가난하고 몰락해 사는 것은 실로 이 절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현재라도 만약 중건한다면 관속들이 부성富盛하기가 옛날과 같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관속들이 화주化主를 소모해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약간의 위전位田을 갖추어 지급하고, 스님 두서너 분을 살게 한 뒤로 이 고을의 형편이 전보다 나아졌다.”



이 설화는 언젠가 망한사가 폐사됐다가 지역 사람들의 노력으로 다시 세워졌으며 인근지역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절이었음을 알려준다.7) 1974년 절 맞은편에 청담중학교를 건립하면서 이 학교 이사장인 이혜성 스님과 비구니 법성法星 주지스님의 노력으로 사찰 부지를 확보해 중건되면서 자비사로 개칭됐다.



| 자비사 불두 |



주석

7)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에서 인용한 『범우고(梵宇考)』에는 “충청도 평택(지금의 경기도 진위군)현 서쪽 1리에 있다.” 고 기록돼 『팽성지』와는 위치가 다르다. 『범우고』는 1799년에 편찬됐고, 『팽성지』 역시 18세기 후반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평택현 지도에도 객사 동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범우고』의 기록은 오류로 보인다. 또한 『가람고(伽藍考)』에 ‘망한암(望漢庵)’으로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절의 규모도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