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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과 유물>불교유적>덕적사지德積寺址(현 덕지사)>창건과 변화
■ 창건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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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덕지사 대웅전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사찰의 유래가 적혀 있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 한 도인이 이곳을 지나며 ‘산세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므로 절을 지을 만한 명당이라’ 명봉산 덕적사로 칭하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한때는 백 칸이 넘는 법당에서 염 불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스님 수백 명이 주석을 했을 정도로 융성했다고 하며 쌀을 씻는 물로 아랫마을 의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물이 마를 날 없던 한 공양주의 손에 피와 고름이 엉겨 붙어 탄식하며 울고 있는데 어느 노인이 오더니 ‘네 병을 낫게 해주랴!’ 하기에 공양주가 병 낫기를 애원했다. 노인이 알려준 대로 좌청룡, 우백호 길목에 한 삽씩을 뜨니 우백호에서 뿜어 나온 피가 계곡을 넘쳤고 좌청룡에서는 어 른 손바닥만 한 빈대가 수없이 나와 물린 사람마다 다 죽었다고 하며 대들보만큼이나 커다란 구렁이와 굵은 칡넝쿨에 덮인 절은 폐허가 됐다고 전한다.”



설화성이 워낙 강한 이야기라 덕적사德積寺창건 후 한 때 번성했다가 폐사됐다는 사실 외에 특별한 정보가 담겨있지는 않다. 더욱이 이 기록으로 창건연대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구전에 의하면 1613년(광해군 5)에 선지대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하나 이 역시 분명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덕적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며 “수정사修淨寺, 덕적사 모두 백운산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1899년에 편찬된 『양성군지』에는 “명봉산鳴鳳山에 있다”고 기록됐다. 덕적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선중기 이후 20세기 초까지 명맥이 유지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덕지산도 조선중기에는 백운산에서 명봉산으로 바뀌었다가 최근에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이 절터에는 덕지사가 들어서기 전 많은 석재가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이 가져갔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