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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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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포리橋浦里76)


조선후기 직산현 언북면과 숙성면 지역이었다가 갑오개혁 뒤 수원군에 편입됐다. 1914년 언북면 교포·숙성면 주교동 일부·진위군 고두면 교포리·송호리를 통합해 교포리라고 했다. 교포리도 조선후기 궁방전과 역둔토 간척에 의해 형성된 마을이다.


교포2리를 ‘궁말’이라고 부르는 것은 궁방전의 흔적이다. 갯골이 발달하고 습해서 땅이 질퍽했다. 큰 갯골은 배로 건너다녔으며 작은 갯골은 널빤지를 놓고 넘어 다녔다. 들판에는 교포(다릿개)·주교(배다리)와 같은 지명이 남아 있다.


교포리는 1리(교포, 다릿개)·2리(궁말, 송호)·3리(월량촌)로 구성됐다. 마을은 다릿개와 궁말이 먼저이고 월량촌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됐다. 다릿개는 45호 내외로 남원 서씨가 다. 교포2리 궁말은 ‘송호’라고도 부른다. 약 35호로 다릿개보다 조금 작다. 기록에는 궁말보다는 송호라는 지명으로 쓰였지만 주민들은 대부분 궁말이라고 부른다.


교포3리 월량촌은 ‘똘건너’다. 월량촌은 해방 전후만 해도 5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아산만의 침식작용으로 농지를 상실한 농민들이 떠나면서 현재는 40호가 안 된다. 해방 전후 길마원과 월량촌은 경작지가 가장 넓었으나 안성천의 침식작용으로 상당수의 경작지가 사라졌다. 심지어 월량촌 옆 안두원은 물속에 잠겼으며 월량촌과 길마원은 폐동廢洞위기까지 겪었다.



다릿개라는 지명으로 친근한 교포리(2007)

| 다릿개라는 지명으로 친근한 교포리(2007) |



주석

76) 이경노(52세), 김린래(76세), 교포2리 거주, 2004년 6월 교포2리 마을에서 인터뷰
      김현권(74세), 2004년 6월 교포3리 마을회관 앞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