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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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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창내리倉內里77)


조선후기 직산군 언북면 지역이었다. 갑오개혁 뒤 수원군에 통합됐고, 1914년 오성면 창내리가 됐다. 창내리라는 지명은 조선후기 간척과정에서 유래됐다. 조선후기 창내리 일대는 5군영 가운데 하나였던 수어청이 간척했다. 마을에는 수어청 둔전屯田의 곡식을 저장했던 창고가 있었다. 창내리는 수어청의 창고가 있던 마을에서 유래됐다. 일제 말에는 일본인 가등이나 길본, 임전조선농장(주) 등이 대규모로 간척해 일본인 농장이 조성됐다. 한국전쟁 뒤에는 피란민들과 충청도, 전라도 지역의 빈농들이 개척단을 조직해 간척했다.


창내리의 자연마을은 원창내(1리)·구창내(2리)·신창내(3리)·동창(4리)이다. 마을규모는 원창내는 25호, 구창내는 60호, 신창내는 50호, 동창리는 48호 내외다. 창내리의 마을은 1914년까지만 해도 원창내 한 마을뿐이었다. 일본인이 간척하면서 구창내와 신창내가 형성됐고, 1990년 창내4리 동창마을이 원창내에서 분동됐다. 동창리東倉里라는 지명은 분동 당시 창내리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해 명명됐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창내리는 ‘똥창내’라고 불렸다. 생활환경이 힘들었고 뿌리가 약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1950∼60년대에 피란민들과 전라도, 충청도 일대의 빈농들이 몰려들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는 오랫동안 지속됐다. 간척된 들판은 경작지는 넓었지만 생산력이 형편없었다. 농업용수와 식수부족도 큰 장애였고, 안성천의 침식작용도 마을을 위협했다. 평택이나 안중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려면 5km 이상 걸어 나가야만 해 아이들 교육도 힘들었다. 창내리 일대의 획기적인 변화는 1974년 아산만방조제 준공과 경지정리사업이 가져왔다. 방조제 준공은 침식작용에 의한 경작지 상실과 농업용수 부족을 해결했고, 생산력을 증가시켜 부촌으로 성장시켰다.



간척지에 형성된 창내리 신창내(2007)

| 간척지에 형성된 창내리 신창내(2007) |



주석

77) 장길호(61세), 이영재(69세), 2004년 7월 구창내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