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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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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안화리安化里78)


대한제국시기 진위군 오정면이었다. 1914년 주교동의 일부와 안화, 송대를 합해 오성면 안화리라고 했다. 안화리는 주변이 들판이고 동북쪽으로는 진위천이 흐른다. 자연마을은 1리(우다내)와 2리(송대)로 구분된다. 안화1리 우다내는 80호가 조금 넘는다. 한때 경지확대로 96호까지 늘었으나 이농현상으로 다시 줄었다. 마을의 큰 성씨는 순흥안씨 문성공파·신창표씨 사옹공파·수성최씨 안양공파·고성이씨 사안공파다.


순흥안씨 문성공파는 500여 년 전에 입향했다. 일제 때만 해도 마을인구의 60%에 달할 만큼 대성大姓 이었다. 근래에 이농移農을 많이 하면서 15호 내외만 남았다. 신창표씨는 11대 300여 년을 살았다.


안화2리 송대松垈의 우리말 지명은 ‘솔터’다. ‘솔터’는 마을 앞 공동우물 옆에 있었던 커다란 소나무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소나무는 수령이 300년 쯤 됐는데 지금은 베어져 확인할수 없다. 송대의 마을 규모는 40여 호다. 일제강점기에도 45호가 유지됐지만 이농으로 줄었다.


조선후기 안화리 주변에는 궁방전이나 역둔토가 많았다. 일제강점기 동척농장이나 친일 지주에게 넘어갔고, 해방 후 농지개혁으로 농민들에게 넘어왔다. 한국전쟁과 아산만 방조제 준공 뒤에는 황무지가 개간되고 갯벌이 간척되면서 경지가 확대됐다. 간척 전 안화리 일대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고랑과 갯벌뿐이었다. 안화1리 우다내 마을에서 진위천 방향으로 있는 소금배·바다내·태편과 같은 지명은 그런 변화를 증명한다. 1930년대 중반 안화1리에는 안화리강습소가 있었다. 강습소는 안화리 송대마을의 최정병씨 형제가 교사였다. 교실은 일자로된 건물 한 칸이었으며 약간의 운동장도 있었다. 마을 안에는 한문서당도 두 개 있었다. 안화리 주민들은 아직도 농업에 종사한다. 경관은 변화가 없다가 근래 진위천 변에 열병합발전소가 들어서고, 서남쪽으로 화성방면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변화하고 있다.



우다내라는 지명이 예스러운 안화1리(2008)

| 우다내라는 지명이 예스러운 안화1리(2008) |



주석

78) 안정균(70세), 안현균(62세), 표윤준, 최서규, 2007년 12월 안화1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