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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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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산리閑山里88)


조선시대 양성현에 속했다가 갑오개혁 뒤 수원군 토진면과 수북면으로 편제됐다. 1914년 판교동·강포리·한산리·수북면 한산리·서신리를 통합해 진위군 청북면 한산리라고 했다.


한산리의 자연마을은 1리(원한산)·2리(수부)·3리(망포, 너더리)다. 마을들은 대략 20∼30호 내외다. 원한산은 해방 전 18호 내외였다가 해방 후 주변지역의 개간으로 45호가 됐으며, 수부는 본래 45호였지만 현재는 30호 내외다. 너더리와 망포도 예전보다 인구가 줄어 37∼38호쯤 된다. 원한산에는 수원백씨, 너더리에는 창녕조씨, 망포에는 연안이씨와 전주이씨가 많다.


어연한산산업단지와 가까운 한산1리 원한산은 수원백씨 문경공파의 동족마을이다. 문경공파는 명종, 선조 때의 학자였던 휴암 백인걸을 파조派祖로 한다. 수원백씨의 입향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후손들은 대략 300여 년전(영조 초)으로 추정한다. 수원백씨가 입향하기 전에 안동권씨가 한 집 살았다고 한다. 마을 앞 갯가에는 ‘권대장벌’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수원백씨는 한산2리 수부(숫뿌리) 등으로 분동되면서 위세를 떨쳤다. 근대 이후 신교육에 대한 열기도 높아 해방 전후 대학생도 여럿이 있었다.


한산2리 ‘수부’는 한산어연공단 옆에 있는 마을로 ‘숫뿌리’라고 하는데 유래를 짐작하기 어렵다. 200∼300년 전만 해도 마을 앞에 바닷물이 유입됐고 갯벌이 펼쳐졌던 자연지형임을 감안할 때 ‘갯가’ 또는 ‘바닷물이 닿았던 곳’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한산3리 ‘너더리’는 ‘널다리’의 사투리다. 널다리는 ‘판교板橋’라는 지명의 우리말이다. 널다리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도로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너더리를 지나는 길은 충청도 서부지역에서 수원과 한양으로 연결된 주요 교통로였다. 현덕면 신왕리 신흥포와 권관리 계두진에서 내려 안중을 거치면 용성리 설창·토진리 고좌·어소리 구설창·한산리너더리를 거쳐 발안이나 수원으로 나갈 수 있었다. 주민들은 이 길을 ‘과거보러 가는 길’이라고 불렀다. 도로가 형성되면 주막 등 편의시설이 갖춰지고 때로는 난장亂場이나 장시場市가 열리기도 한다. 너더리 일대에는 원한산 마을 입구의 돌모루와 한산3리 너더리에 주막이 있었고, 너더리에는 장시도 열렸다. 돌모루 주막은 구설창에서 한산천을 건너기 전 길목에 있어 과객이나 장사치들 외에 왈짜패도 들끓었다. 너더리는 돌모루보다 목이 커서 주막과 장시도 제법 규모가 컸다. 너더리장은 발안장이나 안중장만은 못했어도 근동에서는 제법 큰 축에 속했다 한다. 망포는 본래 포구였던 곳이 조선후기에 간척되면서 농촌마을로 변모한 마을로 ‘망개울’이라고도 불렀다. 20∼30호로 작은 편이며 성씨도 각성바지다. 망포는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쪽은 청북면 한산리 영역이지만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서쪽 마을은 양감면이다.



너더리장이 섰던 한산3리 너더리(2006)

| 너더리장이 섰던 한산3리 너더리(2006) |



주석

88) 백승성(61세), 백승혁(64세), 2005년 7월 백승혁씨 자택에서 인터뷰
      돌모루 주막(슈퍼) 주인, 2005년 12월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