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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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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토진리土津里89)


대한제국시기 수원군 토진면이었고, 1914년 토진리와 고좌리 일부지역을 통합해 진위군 청북면 토진리라고 했다. ‘토진’이라는 지명은 토진1리 ‘톷나루’에서 왔다. 톷나루는 진위천의 지류인 관리천에 설치돼 고덕면의 동청나루와 연결됐던 수로교통의 요지로 삼계2리 옹포가 관할했다.


토진리의 자연마을은 1리(톷나루)·2리(고좌)·3리(국길)다. 토진1리 ‘톷나루’는 100여 호의 큰 마을이다. 마을은 ‘동뜸’과 ‘서뜸’으로 나눈다. 마을 규모가 큰 것은 이곳이 옛날부터 나루가 발달한 교통의 요지였고 하천변이 간척되면서 이주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씨가 많지만 대체로 각성各姓이다. 토진土津이라는 지명은 ‘톷나루’에서 유래한다. 토진1리에 나루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앞으로 관리천이 흘렀기 때문이다. 간석지에 만들어진 갯골을 통해 들어온 나룻배와 새우젓배 같은 상선들은 큰길이 지나는 나루터에 사람과 물산을 내려놓았다. 나루터는 공수다리 아래에 있었다. 공수다리는 숙성리-청북 간 도로와 송탄-청북 간 340번 지방도가 만나는 삼거리에 있다. 아주 작은 나무다리에 불과했지만 아산만의 계두진이나 대진(솔개바위나루)에서 수원을 거쳐 한양으로 가던 큰 길과 연결됐다. 옛날에는 다리 아래로 바닷물이 유입됐고 갯골을 따라 배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토진2리 ‘고좌高座’는 60여 호로 마을이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다고 해서 ‘높은자리’라고 부른다. 본래 관리천 냇가에 마을이 있었는데 수해가 심해서 지대가 높은 곳으로 집단 이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좌는 일반적으로 ‘고재’ 또는 ‘고자’라고 부르며 고령 신씨들이 조금 많다.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밭농사 중심이었는데 지금은 논농사가 많다. 고좌마을에는 옛 길이 지난다. 이 길은 39번 국도가 건설되기 전 안중에서 발안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안중장이나 발안장을 보는 장사치들이나 서울로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이 이 길을 지났다.


토진3리의 자연지명은 ‘국길’이다. 국길은 국길과 가재울(가자울)로 구분된다. 국길이 30호, 가재울이 10호다. 국길마을은 수성최씨가 대성大姓이고 가재울은 모씨들이 많이 산다. 수성최씨는 창성공파로 송탄동 막곡, 동청리 개미마을과 같은 계파다. 최씨가 대다수였던 마을에 다른 성씨들이 입향하기 시작한 것은 토진리 일대가 간척되면서부터다. 간척으로 경작지가 넓어진 데다 값싼 농지가 많아 빈농들이 정착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국길의 본래 이름은 ‘국길실말’이었다. 국길실은 ‘큰 길가에 자리 잡은 마을’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을 뜻하는 ‘말’이 덧붙으면서 국길실말이 됐는데, 일제강점기에 마을이름이 너무 길다고 토진리 구장이 ‘국길’로 줄여버렸다. 가재울은 국길 동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일찍이 모씨가 정착해 동족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이 번성하지 못해 아직도 10여 호 정도다. 아랫말은 국길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대궐같이 큰 기와집이 있었는데 기와집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밥 지을 때가 되면 쌀 씻은 물이 3백 미터나 흘렀다고 한다.



근대전후 토진나루였던 토진1리 톷나루(2008)

| 근대전후 토진나루였던 토진1리 톷나루(2008) |



주석

89) 이가순(75세), 이은교(81세), 2008년 8월 토진1리 마을에서 인터뷰
      신윤호(49세), 김현경(80세), 2005년 8월 토지2리 고좌마을에서 인터뷰
      이태우(73세), 최승상(76세), 양승각(62세), 황재열(75세), 2008년 1월 토진3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