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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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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양리老陽里


노양리는 팽성읍에서도 가장 서남쪽이다. 경양포가 있었고 조창이 설치됐던 마을이다. 노양老陽이라는 지명은 1914년 노산의 ‘노’와 경양의 ‘양’에서 한 글자씩 빌려와 만들었다. 계양은 경양의 별칭이다.


노양리는 노양1리와 2리로 구분된다. 노양1리는 옛 경양포가 있던 인처리다. 1리의 자연마을로 건너말·창말·비석거리·뱃말이 있다. 노양2리에는 노산·꽃산·구르목과 같은 마을이 있다. 노산은 노산포로도 부르며, 구르목은 참나무쟁이라는 별칭과 계당말로도 부른다. 노양1리 경양포에는 고려시대 13조창漕倉의 하나였던 하양창6)이 설치됐다. 하양창은 조선건국 후 폐지됐고 대신 직산현과 평택현의 세곡을 모으는 해창이 됐다. 갑오개혁 후 조운제도가 폐지됐고 경양포는 안성천 하구 어업과 팽성읍-현덕면 사이 수로교통의 중심이 됐다. 경양포의 기능은 1974년 아산만방조제 준공으로 중단됐다.


해방 전후 노양1리는 약 60호가 거주했다. 1970년대 이후 어업이 쇠퇴하고 이농현상이 발생하면서 현재는 약 50호(70여 세대, 170여 명)가 거주한다. 노양2리는 노산이 10호, 꽃산이 12호, 구루목이 4호 내외다. 해방 전후에는 노산에만 20호가 넘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고려시대에는 200호가 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7) 일제강점기 이후 노양리 일대는 갯벌이 간척됐다. 하천부지는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된 뒤에도 간척됐다. 간척으로 평야가 발달하면서 어촌이 농촌으로 변모했다.


노양2리는 노산·꽃산·구르목과 같은 자연마을이 있다. 노산은 앞원안·뒤원안들 등이 간척되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꽃산은 본래 호 수가 몇 집 안됐으나 한국전쟁 당시 신대3리에 장단수용소가 설치되고 장단피란민들 일부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커졌다.



노양수로와 꽃산마을(2009)

| 노양수로와 꽃산마을(2009) |



주석

6) 조선 전기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조에는 ‘경양폐현(慶陽廢縣)은 고을 서쪽 44리에 있다. 본래 고려의 하양창(河陽倉)인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令)을 두고 염장관(鹽場官)을 겸임했으며, 본조 태조 5년에 와서 직산에 예속시켰다’ 라는 기록이 있다.
7) 김민철(58세), 노양2리 이장, 2009년 1월 27일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