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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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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렴리古念里93)


조선후기 수원부 감미면의 중심지다. 1914년 감미동·고란평·발오곡을 병합해 고렴리라 했으며 화성군 양감면에 편제됐다. 1987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평택시 청북면으로 이전했다. 고렴리의 자연마을은 감미동(1리)·늘언(2리)·고란들(3리)이다.


고렴1리 ‘감미동’은 옛 감미면의 면소재지로 개미굴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은 아랫말(1반)·중간말(2반)·웃말(3반)으로 구분된다. 해방 전후에는 약 50호였고 지금은 근처 공장에 다니는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83세대로 늘어났다. 가장 많은 성씨는 고령신씨와 광산김씨이며 연주현씨와 경주이씨도 산다. 고령신씨는 약 400∼500여 년 거주했고, 광산김씨도 200년이 넘었다. 근대 이전 만해도 마을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고 저습한 황무지가 많았다. 생업은 농업이 었고 논밭이 반반이었다. 농업생산력이 낮아서 대체로 빈한했다. 공동우물도 3개나 됐고 산신제·정제와 같은 공동제의도 있었고 이동협동조합이나 새마을운동도 활발했다. 감미동 마을은 옛 면소재지답게 각종 교육시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공립보통학교가 마을 안에 있었으며, 신씨네가 설립한 감미동강습소와 야학도 있었다. 공립보통학교는 양감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폐교됐고, 건축자재들은 뜯겨서 양감초등학교 건축에 쓰였다.


고렴2리는 ‘늘언’이다. 발오곡 또는 바로동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였다. 용호초리에는 배가 닿았던 뱃터도 있었고, 1리와 2리 사이에는 옹기굽던 점말도 있었다. 늘언이라는 지명은 간척과 관련이 있다. 늘언 마을은 웃말과 아랫말로 구분된다. 일제강점기에는 30호 내외였지만 지금은 40호로 늘었고, 주변 공장직원들이 거주해 세대수로는 100세대가 넘는다.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했고, 1970∼80년대에 과수농업과 축산업을 일부 했지만 지금은 공장에 다니는 사람도 많다. 고령신씨 문충공파가 대다수다. 고령 신씨는 이 마을에서만 13대 400여 년을 거주했다. 마을 서쪽으로 국도 39호선이 지난다. 마을길과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는 주막이 발달했다. 해방 전후 늘언 주막은 큰 술집 1개와 작은 술집 서너 개가 있었다.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친교를 나누기도 했지만 겨울에는 노름도 하고 윳놀이도 했다. 해방 전까지 당제·산신제도 지냈고 백중날 송아지를 걸고 씨름대회도 열었다.



조선후기 감미동면의 중심 고렴1리 감미동(2013)

| 조선후기 감미동면의 중심 고렴1리 감미동(2013) |



주석

93) 김용숙(81세), 이정훈(82세), 김선중(72세), 한완수(70세), 권이흥(81세), 2013년 2월 고렴1리 경로당에서 인터뷰;  신필호(79세), 신학식(85세), 송안범(73세), 신봉호(81세), 김성천(83세), 2013년 2월 고렴2리 경로당에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