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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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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광리94)


갑오개혁 후 수원군 현암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양산, 인광리, 송담 일부, 보개동, 안외면 송담리, 창촌을 통합해 인광리라고 했다. 인광리는 현덕면의 면소재지다.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농협같은 공공시설과 식당, 잡화점같은 상업시설 그리고 아파트도 이곳에 있다. 인광리가 면소재지가 된 것은 1930년대 중반이다. 면사무소가 옮겨오기 전에는 도대1리 샘골에 있었다.


인광리는 7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됐다. 인광1리는 원인광이다. 옛 국도 39호선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펼쳐진 이 마을은 보통은 인괭이라고 하지만, 양지바른 남향에 자리잡고 있어 ‘양짓말’로도 부른다. 문헌에는 마을의 형성 시기가 1백 년 남짓이라고 되어있는데, 실제 조사과정에서도 3대 이상을 이어온 가문을 찾기 어려웠다. 인광2리는 점촌이다. 예로부터 점촌店村은 수공업자 마을이다. 이 마을은 천주교인들이 모여 옹기를 굽던 수공업자촌이다. 인광3리는 하양산(아랫버들미)이다. 양산(버들미)은 아랫마을과 윗말로 나뉘어졌는데 이 마을이 아랫 쪽에 속한다. 아랫버들미는 평창이씨가 대성大姓이다. 인광4리는 상양산(윗버들미)다. 자연지명은 ‘버들미(버드나무 마을)’다. 인광5리는 문화동 또는 뗏장거리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의 정착촌이다. 특히 ‘뗏장거리’는 피난민들이 뗏장으로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지명으로 고단했던 피난민들의 삶을 대변하는 지명이다. 보시동은 ‘보시곶’에서 온 지명이다. ‘곶’은 바닷가에 돌출된 지형으로, ‘느 지’, ‘느새’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지금은 간척되어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지명에서 1백여 년 전만 해도 바닷물이 유입되는 바닷가였음을 말해준다. 인광6리는 영흥아파트, 인광7리는 한일아파트로 면소재지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대체로 주변 농촌지역에서 이주한 사람이거나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사람들이 많다.



옹기를 굽던 인광2리 점촌(2007)

| 옹기를 굽던 인광2리 점촌(2007) |



주석

94) 박해용(69세), 황종호(82세), 2005년 1월 인광1리 경로당 및 인광2리 박해용씨 댁에서 인터뷰